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 수상한 서재 4
하승민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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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인간을 약하게 만든다. 약점이기 때문에 비밀이다. 그러니 비밀을 털어놓는 건 신뢰 속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내 등에 칼을 꽂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괜찮은 거였다. 어떤 비밀은 털어놓지 않아야 하고, 어떤 비밀은 듣지 말아야 한다. 어떤 비밀을 지키고 털어놓을지는 경험이 알려줬다. 지아는 그런 경험을 쌓을 만큼 많은 인간관계를 맺지 못했다. 스물다섯의 청춘은 그래서 위태롭고 불안했다.   p.31

 

뉴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의 겨울, 스물 다섯의 지아는 치매병동의 간병인으로 일했다. 어린 시절 군인에게 쫓기던 청년을 도와주다가 어머니가 죽임 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다. 게다가 어머니의 죽음은 어린 지아의 실수에서 비롯되었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녀에겐 제2의 인격이 생겨난다. 정신을 잃고 깨어 나면 기억하지 못하는 사달이 벌어져 있었고, 혜수라고 이름 붙인 그 인격은 지아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간병인으로 일하던 중 직장 동료에게 상해를 입힌 혜수로 인해, 지아는 피해자의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하게 되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려 보니 눈이 닿는 곳마다 검은 산이었다. 낯선 하늘, 처음 보는 나무, 젖은 흙냄새로 가득한 산속에서 메스꺼운 두통과 함께 눈을 뜬 지아는 자신이 삽을 쥐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발 아래, 구덩이 속에 반쯤 파묻혀 있는 젊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흙으로 덮지 못한 반쪽짜리 얼굴은 원망과 공포로 허우적거렸다. 그런데, 지아는 모르는 여자였다. 언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곧 해가 뜰 시간이었고, 지아는 사람들을 피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국도를 따라 서울을 향해 걸으며, 그곳이 묵진이라는 것과 혜수가 가져간 시간이 무려 19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묵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잃어버린 19년 동안 자신은 어떻게 살았던 걸까.

 

 

지아는 항우울제와 감기약을 한 번에 때려 넣었다. 비눗방울이 터지듯 푱푱 소리가 났다. 조용한 것들이 좋았다. 얼어 있고 정지해있는 것들을 사랑했다. 정지해있는 것들은 썩지 않았다. 변화하는 것들만 추한 모습으로 늙어갔다. 지아는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 속에 몸을 담갔다. 얼마 후 소용돌이치는 듯한 전동 드라이버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p.356

 

<콘크리트>라는 인상적인 데뷔작으로 호평받았던 하승민 작가의 신작이다. 이번 작품은 묵진이라는 가상의 항구 도시를 배경으로 다중 인격이라는 소재를 색다른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지아는 자신의 다른 인격인 혜수가 누구를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그리고 묵진에서 왜 그 오랜 시간을 머물렀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묵진으로 향한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을 찾기 위해서,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를 알아내기 위해서, 스스로가 남긴 자취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19년이 바꿔놓은 세상과 19년도 바꾸지 못한 세상이 교차편집 영상처럼 흐르는 가운데, 지아가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충격적이다.

 

 

다중인격, 혹은 해리성 장애라고 불리는 정신 질환은 스릴러 장르나 영화에서 꽤 다루어진 편이다. 다중인격이란 한 사람이 둘 이상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을 뜻하며, 보통 어떤 정신적 충격이 계기가 되어 마치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증상을 보인다. 원래 사람의 내면은 여러 가지 인격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특정 상황에 적응한 성격이기도 하고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이기도 하다. 또한 누군가를 따라 하거나 상상해낸 성격일 수도 있다. 집에서는 얌전했던 내 딸이 친구들 사이에선 나서기 좋아하는 리더로 변신하고, 회사에서는 자주 소리 지르는 무서운 상사였지만, 집에 와서는 세상 누구보다 다정한 아빠가 되기도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내 속에 너무도 많은 나'중에서 가장 어둡고, 이질적이고, 거침없는 존재가 형상화된다면 어떨까. 게다가 그 존재는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었고, 어떤 것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면 말이다. 뒷수습은 가장 평범하고, 소심하고, 힘없는 '나'가 해야 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19년이라는 공백을 쫓는 여정이 고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서사에 긴장감이 부여되고, 미스터리에 감정이입이 되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숨가쁘게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육백 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분량을 압도적인 서사로 꽉 채우고 있어 지루할 틈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독특한 캐릭터의 힘과 날 것 그대로의 거친 묘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쉴 틈 없이 밀어붙이는 놀라운 작품이다. 문장이 거칠고 투박해서 세련된 맛은 없지만, 서사의 힘이 그 모든 것들을 상쇄하고 있어 앞으로 나올 다음 작품을 더 기대하게 만든다. 물론 그 전에 데뷔작인 <콘크리트>부터 챙겨서 읽어볼 예정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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