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토마시 예드로프스키 지음, 백지민 옮김 / 푸른숲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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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에 들어오는 네가 익숙해져 갔지만, 그래도 우리는 말 한번 섞지 않았다. 휴식 시간이면 우리 작업반이 밭 가두리에 있는 오두막이 드리운 그늘에서 쉬곤 할 때 너는 다른 남자애들 몇몇과 담배를 피웠고, 나는 여자애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너와는 잡담하지 않았다. 네가 나를 피할 수 없도록 내가 너를 피했다. 나는 네 영향력이 미치는 세력권 안에 있고 싶지 않았다. 네가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뿜는 경쾌함과 아름다움이 나는 부러웠다.    p.57

 

이야기는 오늘 아침 폴란드 사회주의 공화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뉴스 특보로 시작한다.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루드비크는 라디오 뉴스를 들으면서 한 사람을 떠올린다. 사실 루드비크는 열두 달 전의 그날부터, 비행기에 올라타 바다를 건넌 그날부터, 그를 마지막으로 보고 나서 연옥과도 같이 느껴졌던 일 년간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국이 산산 조각나고 있는 지금, 그를 마음에서 지워버린 체하는 걸 그만두기로 한다.

 

1980년대 사회주의 체제 하의 폴란드였다. 마지막 대학교 기말고사를 마치고 맞이한 여름이었다. 당시 루드키브는 책을 통해 자신만의 갑옷을 입곤 했다. 책 속 이야기에 스스로를 가두었고, 스스로 책 속 인물인 양 행세했으며, 현실의 매서운 칼날을 막아주는 방패인 것처럼 어디를 가든 책을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졸업 전 떠난 농촌활동에서 야누시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같은 학년이었음에도 그 전가지는 서로를 몰랐으니, 영영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지만, 운명의 방향은 그곳 호숫가에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루드비크는 '불온서적'으로 지정된 제임스 볼드윈의 <조반니의 방>을 몰래 읽고 있었다. 책의 운율과 언어에서 은연중 암시되는 지식과 내재한 불운에 관한 직감이 그의 마음에 곧장 꽂혔던 것 또한 당시 그들 관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두 사람은 <조반니의 밤>을 함께 읽으며 누군가가 자신들을 온전히 이해해준다고 믿었고, 그들의 내일을 상상했다.

 

 

 

우리가 호숫가에서 며칠이나 머물렀는지 모르겠다. 하루하루가 하나의 온전한 세계와 같았고, 매 순간이 새롭고 다시 오지 않을 경험이었으니까. 어떤 면에서 호숫가에서의 나날들은 내 생애의 첫 나날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내가 그 호수와 호숫물과 네게서 태어난 듯이. 마치 내가 허물을 한 꺼풀 벗어 던지고 이전의 삶일랑 등져버린 듯이.    p.98

 

이 작품은 토마시 예드로프스키의 첫 장편소설로 '사회주의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는 감동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는 단순히 이 작품이 퀴어 소설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운 문장과 사유가 빛나는 작품이라서 일 것이다. '나는 너를 통해 다른 은하계로 빠져들어갔고 네 입은 더 나은 우주로 통하는 현창'이라는 설레는 문장부터, '기어이 우리라는 개념을 놓지 못한 채 아는 얼굴의 파편이라도 바라며 수많은 얼굴을 살펴보면서, 생경함 속에서 낯익음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이라는 마음 아픈 문장들까지..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 페이지들마다 가득한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이들의 금지된 사랑은 일거수일투족이 감시 당하는 사회주의 체제라는 배경 속에서 더욱 더 애틋해진다. 동성애라는 죄목으로 체포가 가능했던 시대, 명단을 만들어 추적을 하고, 그렇게 모은 정보로 사람을 쥐고 흔드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들 사이는 언제나 비밀이었다. 게다가 서로를 알아보고, 갈망했던 루드비크와 야누시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체제의 정당성을 믿고 그 안에서 출세하고자 하는 사람과 자유의 가능성을 믿고 힘껏 부르짖는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반대편을 바라보며 양극단으로 향하게 되고, 사랑은 어긋나버린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지금 이 계절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시원한 표지 이미지도 그렇지만, 쓸쓸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주는 햇살의 반짝거림과 애처롭고 안타까운 이야기가 주는 서늘한 바람 같은 느낌 때문일 것이다. 올 여름 이 작품과 함께 계절을 만끽해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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