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퍼 네트워크
챈들러 베이커 지음, 이동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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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와 나란히 앉아서 일했다. 인사, 회계, 감사, IT 부서에 포진한 그들은 우리의 위와 아래에 있었다. 그런 남자들과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회사가 전통적인 남학생 클럽의 영역이라면, 우리는 비밀 여학생 조직을 구성해 이에 대항하는 셈이었다. 우리는 비밀 악수법을 공유했고, 서로를 여성 전우로 여겼다.      p.88

 

여느 때와 다름 없던 평일 오후, 점심시간이 막 지난 즈음 누군가 회사 18층 발코니에서 추락한다. 대체 누가, 왜? 그날, 그 시간에, 회사에서 떨어져 죽어야 했을까? 이야기는 그 일이 있기 삼 주 전에서 시작한다. 그날 아침 스포츠 의류 브랜드 트루비브의 CEO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회사에 소속된 변호사들은 급히 소집되어 대처 방안을 논의한다. 이야기는 슬론과 아디, 그레이스와 혼자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으로 사내에서 9년 동안 청소원으로 일하고 있는 로살리타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그리고 새로 입사한 젊은 변호사 캐서린과 그들의 상사인 에임스가 있다. 슬론은 상사인 에임스와 과거에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이후 십 년 동안 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 아디는 남편의 바람으로 이혼했고, 그레이스는 얼마 전에 아이를 낳고 회사로 복귀한 참이다.

 

유력한 차기 CEO 후보로 떠오른 것은 대표 변호사인 에임스였다. 그는 유능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지만, 여자 부하 직원을 대하는 태도로 인한 소문이 무성한 사람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새로 입사한 젊은 여자 직원인 캐서린에게 접근하려는 참이다. 여직원들의 숱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하던 그가 이제는 꼭대기에 오르게 생겼는데, 보고만 있어야 할까. 이때 ‘배드맨 리스트’라고 불리는 엑셀 파일이 여직원들 사이에 은밀하게 떠돌기 시작한다. 배드맨: 댈러스 나쁜 놈 경계 리스트. 나쁜 놈들, 조심할 것. 스프레드시트의 리스트에 있는 남자들은 이러저러한 끔찍한 짓을 했다. 여자들은 리스트를 만들고 재차 확인하면서 누가 착한 놈인지 나쁜 놈인지 가려내려고 애썼다. 슬론은 배드맨 리스트에 에임스의 이름을 올려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만성질환을 달고 살듯 우리는 죄책감을 떠안고 살아가지만, 장담컨대 우리의 질환이 훨씬 치료하기 힘들었다. 우리는 온갖 죄책감을 느꼈다. 워킹망이라서, 아이가 없어서, 사회적 의무를 저버려서, 그럴 여유가 없는 걸 알면서도 초대에 응해서, 이미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일을 거절해서 혹은 거절하지 않아서, 월급 인상을 요구해서 혹은 정당하게 요구하지 못해서... 어느 하나 같은 죄책감이 없었다. 충분한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게 또 죄책감으로 다가오니, 이런 도덕적 딜레마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우리 능력이 대견할 지경이었다.      p.365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위스터 네트워크'라는 용어는 보통 자신이 종사하는 산업의 남성 권력자 중 성희롱이나 성추행 혐의가 있는 이들의 명단을 은밀하게 공유하는 것을 일컫는 여성들만의 비공식적인 정보 네트워크를 말한다. 미국에서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던 시기에 실제로 미디어 산업 등에서 공유되던 리스트가 공개되며 이슈가 되었다고 한다. 작가인 챈들러 베이커는 변호사로 일하던 당시 로펌에서 일할 때 실제로 위스터 네트워크희 혜택을 누린 적이 있다. 작가는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워킹맘으로서 본인이 겼었던 일과 직장을 다니는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일들을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여자들도 그저 일하고 싶었을 뿐이다. 회사의 남자들과 같은 대우를 받기를 원했다. 매일같이 업무 사이에 크고 작은 일이 백 개는 넘게 생겨났고, 그 종류는 부수적인 것부터 부도덕한 것까지 가지각색이었다. 일만으로도 바빠 죽겠는데, 웃으라는 말을 들어야 했으며, 자신의 몸에 손대려는 남자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그녀들은 그냥 일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법률가 사이에 떠돌던 미확인 리스트였고, 그 결과로 한 남성이 18층 건물 아래로 곤두박질쳐 목숨을 잃었다. 그는 페미니스트의 마녀사냥으로 발생한 희생자일까? 혹은 피해자의 탈을 쓴 가해자일까? 이 책은 성추행이라는 소재를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직장에서 여성이 견뎌야 하는 것들에 대한 모든 것을 날카롭게 그려내고 있다.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 각종 진술서와 녹취록 등과 함께 과거에서 현재까지 사건의 진상을 밝혀나가는 식으로 진행되는 스릴러이자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모르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지 말 것, 남자와 단둘이 한방에 있지 말 것을 경고해주고, 함께 피해 다니고, 아무도 폭탄을 맞지 않도록 지뢰 표시를 하고, 서로 같이 다녀야 하는 여성들의 눈물 겨운 연대가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벌어지는 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세상 모든 여성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쉿, 그 남자를 조심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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