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 모멸에 품위로 응수하는 책읽기
곽아람 지음, 우지현 그림 / 이봄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홀로 있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삶이 주는 상처에 대한 면역력이 약하다"는 문장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므로. '혼자 잘 노는 사람'이라는 것이 나의 무기 중 하나라고 늘 생각해왔다. 회사 연수차 1년간 뉴욕에서 홀로 생활했던 서른여덟, 아홉 살 무렵 특히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모든 일을 혼자 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책벌레인 사람은 '혼자력'을 키울 수밖에 없다. 책읽기야말로 혼자 놀기의 '끝판왕'이기 때문에.     p.182

 

곽아람 작가는 책에 대한 책, 독서 에세이를 여러 권 썼다. 청춘의 독서를 이야기했고, 절판 아동 도서 수집기로 유년의 독서를 돌아봤고, 아메리카 문학 기행도 있었다.  첫 책을 썼을 때 6년차 직장인이었던 그녀는 이제 19년차 직장인으로, <조선일보> 최초의 여성 출판팀장이 되었다. 직장인으로서, 그리고 여러 권의 책을 낸 작가로서나 사회적으로 성공했음에도 자신은 야망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야망 따위를 갖지 않고 초연해지고, 직장에서 아무런 욕심도 갖지 않으며, 일터에서의 자아와 퇴근 후의 자아를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한다. '욕심과 질투로 마음에 옹이가 지는 게 싫었던,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밑바닥까지 추해지지 않고, 최대한 우아함과 품위를 유지하고 싶었던', 그러한 생각의 배경에는 어릴 적 읽은 책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의 영향이 컸다.

 

이 책은 작가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부터 최근에 나온 책까지, 20권의 책을 통해 마음을 이야기하는 독서일기이다. <소공녀>의 세라, <빙점>의 요코, <작은 아씨들>의 조, <유리가면>의 마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 <우아한 연인>의 케이트,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의 마플 양에 이르기까지.. 스무 권의 책 속 스무 명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문학 작품 속 인물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비커밍>의 미셸 오바마, <배움의 발견>의 타라 웨스트오버 등 여성 작가들도 만날 수 있다. '중년이라 하기엔 미숙하고 청춘이라기엔 무거운 나이, 40대의 책읽기'는 어떤 모습일까 기대가 되었다.

 

 

 

독서에는 여러 목적이 있겠지만 어린 날 책읽기의 가장 큰 효용이자 목적은 바로 이것이라 믿는다. 어린아이의 여린 마음을 둘러싸는 보호막이 되는 것. 그 막은 더 많은 책을 읽을수록 더욱 유연하면서도 튼튼해진다. 터지지 않는 비눗방울 같은 형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훗날 어른이 되어 금력이라든가 권력이라든가 하는 세속적인 가치들이 마음을 어지럽힐 때 흔들림 없는 성채이자 단단한 방패가 되어준다.      p.191

 

<소공녀>의 세라는 한 순간에 '특별 학생'이었다가 학교의 하녀로 전락한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개발하던 아버지가 파산 후 세상을 쓰자, 공주 같은 삶을 살던 세라는 쥐가 우글거리는 다락방으로 쫓겨나 학교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하지만 세라는 춥고 어두운 다락방에 살면서 갖은 모욕을 받으면서도 견뎌낸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로 쌓아온 교양이 가장 힘든 순간에조차 품위를 잃지 않도록 하는 무기가 되어준 것이다. 갖은 역경과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고결한 품성을 지닌 '공주'라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온실 속의 화초'에서 벗어나 굴욕과 모욕과 억울함과 부당함의 순간들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마음속으로 세라를 떠올리며 버텨냈다고 말한다. 힘겨운 일이 생기면 고통을 겪고 있는 책 속 누군가를 생각하며 위로를 받았던 소녀의 마음이 성인이 되어서도 고스란히 이어진 것이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던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릴 때 읽은 책들은 자아의 일부분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작가는 <빙점>을 읽으며 비밀을 갖는다는 건 어른이 된 증거라고 여기게 되었고, <유리가면>을 읽으며 재능과 노력에 대해, 배경과 실력에 대해 고심했다. <빨강 머리 앤>을 다시 읽으며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나를 좋아해주었던 너그러운 친구들을 떠올려 본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을 통해 '일하는 여자'로서의 공감을 느끼기도 하고, 마흔 즈음이 되어서야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폭풍의 언덕>을 다시 읽으면서, 10대 때는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열정과 광기 어린 사랑에 책장을 넘기는 손끝이 달아오르기도 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을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 때문이 아닐까. 분명 읽었던 책인데, 이 책이 이런 이야기였던가 싶었던 순간은 독서를 특별한 체험으로 만들어주곤 하니 말이다. 어린아이의 여린 마음을 둘러싸는 보호막이 되어주는 독서부터, 악의보다는 선의를 기억하는 인간으로 자라난 마흔 너머의 독서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돌아보는 시간은 우리가 이미 갖고 있었던 태도와 잊고 있었던 품위를 깨워준다. '모멸에 품위로 응수하는 책읽기'가 궁금하다면, 사회적인 성공보다 나답게 사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