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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었고 책임감을 가지고 써야 하는 글도 있다고 생각했다. 두렵고 외롭고 허탈할 때가 많았지만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기록으로 남기려고 애썼다. 하지만 적의는 호의보다 훨씬 힘이 셌다. 내가 하지 않은 말들이 따옴표 안에 들어가 인터뷰 기사에 실렸고, 내 소설에 있지도 않은 문장과 에피소드가 인터넷 리뷰에 올라왔다. 결국 내가 졌다. 이용당한다는 생각, 절대 가지지 않으려던 그 마음이 드는 순간, 내가 망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분홍신을 신은 발은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내 목표는 오직 한 가지, 신발을 벗는 것이었다. - '오기' 중에서, p.57~58
나는 아버지가 가출했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는다. 올해 나이 일흔둘, 치매 등 정신 질환도 없고, 정년까지 근무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결근한 적 없었던 아버지이다.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삼남매가 한자리에 모이지만, 딱히 아버지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였다. '내가 살면 얼마다 더 살겠니. 이제라도 내 인생 살고 싶다. 나를 찾지 마라'고 쪽지를 남겨둔 아버지는 저금한 돈도 일부 찾아 나갔다. 이제 엄마 혼자 남겨진 집에는 각종 공과금 수납이며 돈 관리며, 평생 아버지가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도맡아 온 크고 작은 일들을 처리할 사람이 없다. 엄마는 그 동안 딱 살림에 필요한 금액만 생활비로 받아 썼을 뿐 다른 건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버지의 부재에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나는 간간히 오는 카드 문자로 아버지가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카드는 막내딸인 자신이 아버지에게 주었던 것으로 다른 가족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이기도 했다. 카드의 내역을 보며 나는 아버지도 가족을 떠나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쓰기 시작한 글이라고 한다. 각자의 생활에 바빠 자주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이 장례식으로 모두 모였는데, 정작 그 상황을 만든 아버지가 안 계신 상황이 기묘하기도, 괴롭기도 한 것에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한다. 조남주 작가의 신작 소설집에는 10대부터 80대에 걸친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다양한 나이대의 여성들이 겪는 삶의 경험을 다시 읽고 다르게 읽는 확대된 여성 서사는 여러 시간대에 속한 ‘김지영들’이 연결되며 존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지영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함께 만나볼 수 있는 소설집이기도 하다.

"그런 말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평생 들었어."
평생 들어도 무뎌지지 않는 말이 있다. 껍데기만 남겨두고 몸 안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조그맣고 부드럽던 지혜가 그때의 나만큼 자라 거칠게 묻는다. 나한테 왜 그랬어? 대답할 수 없어, 지혜야. 대답하면 나는 껍데기까지 무너져 버릴 테니까. 네 질문과 내 대답은 부메랑이 되어 너에게 돌아갈 테니까.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 '오로라의 밤' 중에서, p.201~201
이 책에는 작가가 2010년에 쓰기 시작했던 작품부터 코로나로 일상이 무너졌던 2020년 여름에 쓴 최신작까지 총 여덟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공감이 되는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특히 노년의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두 작품, <오로라의 밤>과 <매화나무 아래>를 인상적으로 읽었다. 여든 살의 '나'는 임종을 앞둔 치매 환자인 큰언니를 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남편도 보냈고, 아들도 먼저 보내본 나는 곧 큰언니도 먼저 보낼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게 의미 있는 것인지, 아무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하루하루 죽을 날을 향해 걸어가고만 있는 지금의 나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한다.
쉰일곱의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인 '나'는 10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한 남편 대신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손자 양육을 거절한 탓에 워킹맘인 딸과 갈등 중이지만, 오랜 버킷 리스트를 실천하기 위해 캐나다로 오로라를 보러 떠난다. 아직 노년의 삶을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이상하게 공감되고, 이해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의 삶은 우리의 미래 모습, 혹은 우리 어머니 세대 여성들의 모습일 것이다. 무엇보다 더 이상 젊지 않은 이들 여성들이 연대나 공감을 통해 성숙해지고,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점이 뭉클했다. '사는 일에 별다른 에너지를 쓰지 않으며, 가사 노동에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으며, 인정과 이해를 구걸하지 않으며, 물 흐르듯 나이 먹을 수(p.232)' 있다면,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다. 한번쯤 그런 생각을 해 본 세상 모든 여성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작품에 수록된 많은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이자,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그리고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