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
정옥희 지음, 강한 그림 / 엘도라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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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는 완벽주의와 성실함을 근본으로 삼는다. 매일같이 꾸준히 노력하지 않으면 이루기 힘든 영역이다. 무용수들은 성실 근면이 뼛속까지 차 있다. 문제는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다 보니 전공생들은 어려서부터 가학적일 정도로 금욕적이고 자기 비판을 내재화하게 된다는 점이다. 자신의 장점보단 단점이 먼저 보이고 크게 보인다.... 나는 발레를 그만두고서도 늘 완벽하려 애쓰는 마음 때문에 제풀에 지칠 때가 많았다. 더 잘하고 싶고, 더 많이 해 내고 싶고, 더 돋보이고 싶은 마음에 나를 갈아 넣으며 몰아세웠다. 남편은 제발 ‘시간표 빈칸 채우기’를 하지 말라고 했다.     p.128~129

 

발레리나라고 하면 누구나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핑크빛 발레 슈즈와 사뿐거리는 튀튀, 빛나는 왕관과 보석 장식을 두른 가냘픈 여성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우아하고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모습 뒤에 감춰진 것은 땀에 절어 소금이 더께 앉은 레오타드, 발가락을 종이 테이프로 칭칭 감고 물집을 터트리고 달래듯 주무르던 손길, 파스 냄새와 땀 냄새가 후텁지근하게 배어 있는 탈의실, 무대 뒤의 하염없는 대기 시간들이다. 매일매일 연습실에서 같은 순서로 몸을 풀고 같은 동작들을 수업이 반복해서 쌓아온 시간들이다.

 

 

저자는 여덟 살 때부터 발레 학원을 다니기 시작해 발레 전공으로 대학 무용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엔 프로페셔널 발레단에서 활동했으며, 현재는 무용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녀는 발레리나에 대한 눈먼 찬사가 불편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무언가를 전공한다는 것의 보편적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단순히 즐길 때는 절대 알 수 없는, 그 속에서 오래도록 허우적댈 때 펼쳐지는 애증의 파노라마를 말이다. 발레에 문외한인 일반인들이 읽으면 더 재미있는 세계, 모든 발레 무용수들이 겪는 치열한 사투의 현장이 페이지 곳곳에 가득한 아름다운 책이었다.

 

 

포인트 슈즈를 신는 건 부드러웠던 발이 고목나무 뿌리처럼 거칠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체중이 실려 발톱이 까매지고 발가락 마디마디 물집 잡히고 까지는 건 예사다. 아무리 테이프로 발가락을 감싸고 쿠션을 대어도 작품 두세 번 연습하면 피가 났다... 포인트 슈즈 뒤축을 자르고 고무줄로 잇거나 솜을 대거나 온갖 방법을 다 써 봐도 소용없었다. 굳은살이 충분히 쌓이고 나서야 웬만한 연습엔 끄떡없는 발로 거듭났다. 뜨거운 모래에 손을 박으며 단련하는 쿵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단단하고 날카롭게 벼려진 발이 되면 비로소 포인트 슈즈를 신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유롭게 춤출 수 있달까.     p.191~192

 

공감이 되는 문장들이 많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이 부분이다. <‘이 공연을 하다가 죽어도 좋아.’는 아마추어다. 프로에겐 이번 공연이 끝이 아니다. 무대에서 크게 실수하여 울면서 집에 걸어갔더라도, 다음 날엔 여느 날과 같은 모습으로 연습실에 들어온다.> 왜냐하면 한 순간 반짝이며 폭발하는 것보다, 매일 꾸준하게 같은 수준을 유지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매일 계속되는 공연이니 오늘 하루 실수하더라도, 내일 더 잘하면 되겠지.. 라는 마음은 프로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오늘 공연에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쏟아 붓겠어! 라는 마음 또한 프로의 모습은 아니다. 공연에는 비용과 시간을 들여 그것을 보러 오는 관객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들에게는 그날 그 시간의 공연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프로라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같은 수준의 기량을 똑같이 보여줄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일 것이다.

 

 

이 책은 한 켤레에 몇 만원이나 하지만 고작 열 몇 시간 연습에 닳아 버리는 포인트 슈즈, 평생을 지독하게 이어온 다이어트, 박수 갈채를 받았어도 다음 날 또 다시 연습실에서 첫 블록부터 차근차근 쌓아가야 하는 연습의 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그만두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거지? 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을 매개로 초심자가 베테랑이 되어 가는 1만 시간의 견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무대 복귀를 꿈꾸는 발레리나 엄마를 향한 사회의 포용력과 한계, 남성 무용수들의 레오타드를 향한 왜곡된 시선들, 유색인 무용수가 무대에 설 때마다 체감해야 하는 백인 주류의 문화 양상들, 시대에 뒤떨어진 인권 감수성과 예술성을 사이에 둔 양가적 해석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무대 뒤에 숨겨진 발레의 이슈들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 1만 시간은 하루 세 시간을 꾸준히 투자했을 때 대략 10년이 걸리는 긴 시간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1만 시간을 견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오늘 하루를 치열하게 보낸 우리에게 위로와 공감을 안겨주면서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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