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한 조각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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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디에선가 관찰이라는 행위에 의해 관찰 대상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앨과 내 경우에는 확실히 맞는 말이다. 앤디가 있으면 구석구석 우리가 모르는 곳 없는 이 낡은 집의 아름다움에 좀더 눈을 뜨게 된다. 누르스름한 들판을 지나 바다까지, 일정하지만 항상 변화하는 그 풍경과 축사 지붕에 앉은 시커먼 까마귀떼와 머리 위에서 맴도는 매를 전보다 더 관심 있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곡식 자루, 움푹 들어간 들통, 서까래에 매달린 밧줄. 앤디의 붓에 의해 이런 평범한 물건과 도구들은 시간을 초월한 다른 세상의 것으로 탈바꿈한다.      p.122

 

이 작품은 앤드루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라는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황량한 들판에 몸을 틀고 앉아 저 멀리 언덕 위에 있는 집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은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와 오랜 시간 우정을 나누며 그에게 영감을 선사했던 실존 인물을 그린 것이다. 작가인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은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직접 그림을 보고, 크리스티나 올슨의 집에 가보며 그녀와 앤드루 와이어스의 후손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리하여 실존 인물의 삶에 문학적 상상력을 더해 소설을 구상해나갔다.

 

 

극중에서 이 그림은 '뒤틀린 다리를 뒤로 늘어뜨리고 손가락으로 흙을 움켜쥐고 들판을 기어가고 있지 않은가. 개밀과 큰조아재비가 자라나 있는 건조하고 황량한 벌판. 감추어져 있지 않으려는 비밀처럼 멀리서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는, 저 무너져가는 집...'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잿빛 하늘 아래 어딘가 불편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여인의 표정은 우리가 볼 수 없지만, 그 몸짓에서 결연한 의지와 갈망이 느껴진다. 이 여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 사람의 뒷모습이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인지, 얼굴에 스치는 표정들은 때때로 바뀌게 마련이지만, 무방비한 뒷모습이 그려내는 것은 더 단순하면서도 명확하다. 그것은 외로움일수도, 쓸쓸함 일수도 있겠고, 삶 전체일 수도 있다. 그것은 과거를 거쳐 현재를 살아내고 미래로 향하는 무언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저자인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은 이 여인의 뒷모습에서 어떤 이야기를 읽어 냈을까. 어떤 영감을 얻어 소설로 만들어지게 됐을까. 책을 읽기도 전에, 첫 장에 수록된 그림 한 장이 내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나는 소망의 파괴력에 대해 생각해본다. 현실적이지 않은 것을 원하는 마음과 구원의 가능성을 믿는 마음의 파괴력에 대해 생각해본다. 보스턴에서 보낸 시간으로, 병을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내 믿음만 더욱 공고해졌다. 내가 나뭇가지에 펄럭이는 누더기를 매달고 머리 위로 아무리 열심히 흔들어도 멀리서 어선이 나를 구출하러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이지만 다르게 살 수 있는 한 번의 기회가 왔다가 사라졌다는 것을 뼛속 깊이 실감한다.     p.271~272

 

건조하고 황량한 벌판, 멀리서 어렴풋이 보이는 무너져가는 집,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아득한 창문, 구정물 색 하늘.. 하지만 이 그림은 들판에서 그려진 것이 아니다. 화가는 그 그림을 집안의 방에서, 전혀 다른 각도에서 창조해냈다. 그건 그가 그림 속 여인의 삶에 대해서 공감했거나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 속 여인인 크리스티나와 화가인 앤드루 와이어스 사이에는 묘한 연관성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병약한 아이였고, 고집이 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녀는 어릴 때 열병을 앓고 난 후 거동이 불편해졌고, 답답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는 척추측만증으로 열두 살 때 수술을 받고 긴 여름 내내 석고 깁스를 하고 있어야 했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의 반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그는 아버지로부터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고, 그녀는 집안을 건사하는 법을 배웠다.

 

이야기는 그녀가 세 살 때인 1896년에 시작하는 과거와 그와 처음 만난 1939년부터 이어지는 현재가 교차 진행되고 있다.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녀에게는 세상의 전부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세상의 작은 조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작고 미미한 존재이고,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세상이라는 것은 한정되어 있으니 말이다. 깨져버린 꿈과 약속을 딛고 지금까지 살아온, 캔버스 가장 자리까지 펼쳐진 세상의 중심에서 살고 있는 이 여인의 이야기를 만나 보자. '가끔 가장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진실일 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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