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형추 FoP 포비든 플래닛 시리즈 11
듀나 지음 / 알마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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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얼리 제도 끝에 솟아 있는 십자가 모양의 작은 섬나라. 그럭저럭 빽빽하지만, 생물학적 다양성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열대림, 섬 중심에 있는 쓸데없이 높은 사화산, 아까운 줄 모르고 지하수를 뽑아 쓰다 지반이 무너져 진흙탕 속에 잠겨버린 마을과 도시들. 그리고 아름다운, 정말로 아름다운 나비들. LK가 정복하기 전, 파투산은 그런 곳이었다. 15년 전 LK가 파투산에 궤도 엘리베이터를 세운다는 계획을 발표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거대하고 둔하고 느린 궤도 엘리베이터는 비행선 같은 과거의 몽상처럼 보였다. 아름답고 장엄하지만 굳이 만들 필요는 없는.      p.24~25

 

브라이얼리 제도 끝에 솟아 있는 빽빽한 열대림의 섬 파투산. 인구의 3분의 2가 인근 두 섬나라로 흩어져 거의 폐허가 된 왕년의 휴양지에 LK라는 기업이 궤도 엘리베이터를 세웠고, 섬은 지구의 관문이 된다. 궤도를 도는 스카이후크로 매일 서너 대씩 우주선이 궤도 바깥으로 나가곤 했던 우주 시대였다. LK는 정지위성에서 위아래로 늘어뜨린 거미줄이 한쪽으로 파투산에 닿고, 다른 한쪽은 평형추로 향하는 가늘고 긴 궤도 엘리베이터를 건설했고, 그로 인해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섬은 국제도시로 다시 태어난다.

 

해변에 새 항구와 공항이 생겼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주로 가는 길을 닦고 있었다. 하지만 섬은 이제 일개 다국적 기업의 소유물이 되었고, 정부는 껍데기만 남았으니, 그에 불만을 가진 원주민들을 중심으로 파투산 해방전선이 만들어진다. 그러한 해방전선과 그들을 지원해 한몫 챙기려는 무리들을 추적하고 다루는 일을 하는 LK 대외업무부의 수장 맥이 이야기의 화자이다. 맥은 암살사건 용의자의 체포 작전을 수행하던 중 수상한 한국인 남자를 발견한다. 그는 바로 LK의 신입사원 최강우로, 나비와 궤도 엘리베이터를 좋아하는 이십 대 후반의 남자였다. 이상한 것은 나비 이야기를 할 때는 몽상적이고 멍한 느낌이던 남자가 궤도 엘리베이터에 이야기할 때는 치밀하고 조직적이고 독단적인 모습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거였다. 게다가 맥은 그의 말투와 태도가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진다. 그 익숙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에 대한 그 사람의 기억은 절반, 아니 그 이상이 허구예요. 실제 나와의 관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픽션이 동원되어야 했지요. 그 안엔 수많은 내가 있었어요.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 버전, 더 냉정하고 잔인한 버전, 더 섹시하고 유혹적인 버전, 심지어 나보다도 더 나 같은 버전도 있었지요.  이 자체는 이상하지 않아요. 다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망상을 품고 살잖아요. 요즘 같은 시대엔 그런 망상을 그럴싸하게 현실화시킬 수도 있고...."     p.212

 

거대 다국적 기업 LK와 궤도 엘리베이터, 그리고 하늘 위 평형추를 둘러싼 비밀들을 파헤치는 모험이 펼쳐진다. 하지만 LK 직원을 포섭하려는 해방전선과 파투산을 주시하는 세력들 속에서 최강우와 맥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들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맥과 최강우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최강우는 어떻게 맥과 회장만이 알고 있던 비밀에 접근했으며, 죽은 한정혁 회장은 이들에게 무엇을 남긴 것일까. 광대한 네트워크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 같은 한 회장의 유령은 거대 AI의 성장에 신처럼 개입하려고 하고, 현재의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막을 수 없는 미래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증강현실과 AI가 일상이 되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우주로 이동할 수 있는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지만, 복잡한 세계관과 알 수 없는 용어들로 난무한 여타의 SF 작품들에 비해 굉장히 술술 잘 읽히는 작품이다.

 

듀나는 낯선 미래에서의 놀라운 사고 실험과 치밀한 전개로 ‘듀나 월드’라는 독창적 스타일을 탄생시켰다고 평가 받는 작가이다. 책 속에, 게임 속에, 혹은 시뮬레이션 속에만 존재할 듯한 캐릭터들이 ‘듀나 월드’의 견고한 논리 속에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등장해 낯선 부분과 익숙함이 매력을 발하는 작품들을 그려 왔다. 이번 신작은 2010년 처음 출간된 동명의 단편소설을 장편화했다고 한다. 하지만 기본적인 뼈대만 유지할 뿐, 화자부터 다른 인물로 바뀌며 추리의 설계는 더욱 정교해졌고 인도차이나, 수마트라 문화권의 등장인물들도 더욱 다채로워졌다. 독특한 책의 표지도 작품과 너무 잘 어울리는데,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를 기리는 모뉴먼트에서 영감 받은 장종완 작가의 <Goddess>라는 작품이다. 미지의 우주로 향하는 인간이 열망이 표현된 작품이라 작품과 근사하게 잘 어울린다. '불가능하고도 가능한 세계'를 지향하는 알마의 포비든 플래닛 시리즈를 즐겨 읽고 있다. 듀나의 작품들과 머더봇 시리즈, 빈티 시리즈 등에 이어 앞으로 또 어떤 작품이 출간될 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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