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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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족의 존재는 윤리학자들에게 처음부터 골칫거리였다. 만약 인간의 행위가 호의적이거나 악의적인 정령 때문에 유발된 것이라면, 선과 악이 인간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윤리적인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옳은 행동과 그른 행동은 무엇인지 판단하기도 몹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부 윤리학자들은 그 시대에 실제로 벌어진 윤리적 혼란을 반영하므로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부수적 결과로 윤리학도에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과제를 남겼으니 이 또한 반가운 일이 아닌가.     p.95~96

 

지금으로부터 천 년도 넘은 옛날, 한 도시에 폭풍우가 포탄처럼 들이닥친다. 모든 것들이 물에 잠기고, 전기가 끊어져 어둠이 엄습해오고, 폭풍우가 귓속까지 파고들어 울부짖는 것이 사흘 밤낮이나 계속되었다. 마침내 폭풍우가 그쳤을 때, 사람들에게 괴이한 일이 잇따라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무려 2년 8개월 28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정원사 제로니모는 자신의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지면에서 몸이 떠 있는 공중 부양상태는 침대에 누워도 엉덩이가 닿지 않았고, 땅을 딛을 수도 없었다.  만화가를 꿈꾸는 청년 지미에게는 자신이 창조한 허구적 인물이 실체가 되어 나타나는 일이 벌어진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물이 아니라 마치 데생이나 삽화처럼 보이는 괴물은 머지않아 자신 같은 존재가 이 세계를 차지할 거라고 말한다. 상상 기술자들이 상상하던 세계와 상상의 산물이 갈망하던 세계 사이의 경계선이 뚫려 마치 웜홀을 통과하는 것처럼 이쪽 세상으로 건너올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그렇게 모든 게 달라진다. 인류가 알던 세상은 폭풍우 이후 점점 사라져버리고, 온갖 괴사와 새로운 현상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사실 갑자기 기이한 능력이 생긴 사람들은 모두 마족의 후손의 후손들이었다. 정작 본인들은 몰랐지만 말이다.

 

 

진정한 현실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안다. 세상은 평범한 시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칠고 사납고 기이하다. 평범한 시민은 진실을 외면하고 베일로 눈을 가린 채 무지한 상태로 살아간다. 베일을 벗고 세상을 바라보면 두려워지고, 확신이 무너지고, 기가 꺾이고, 결국 술이나 종교로 도피하게 된다. 이 세상은 원래 그대로가 아니라 그가 만들어놓은 세상이다. 그는 스스로 구상한 세상에 살고, 이 세상을 잘 다루고, 이 세상을 움직이는 조종간이나 엔진, 끄나풀이나 열쇠가 무엇인지, 어떤 단추는 눌러야 하고 또 어떤 단추는 누르지 말아야 하는지 안다. 그가 창조하고 조종하는 진짜 세상이니까.      p.196~197

 

1195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수백년 전 12세기에 마계의 공주 두니아가 위대한 철학자 이븐루시드와 사랑에 빠진다. 이성을 중시하는 이븐루시드는 그녀가 초자연적 존재라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한 채 그녀를 집안에 들여 가정부 겸 연인으로 삼았다. 그녀는 2년 8개월 28일 사이에 세 번이나 수태했고, 그때마다 여러 아이를 한꺼번에 낳았다. 그 아이들은 어머니의 가장 뚜렷한 특징을 물려받아, 한결같이 귓불이 없었다. '두니아'라는 뜻은 그리스어로 '세계'를 뜻하는데, 그녀는 이븐루시드를 처음 만난 날 이렇게 말했었다. "내 몸에서 세계가 태어날 테니까, 그리고 내가 낳은 아이들이 세계로 퍼져나갈 테니까." 그녀의 예언대로 두니아의 후손들은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모른 채 대대로 인간세계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800년이 흐른 21세기의 어느 날, 인간계와 마계 사이의 봉인이 깨지고 두 세계 사이에 통로가 생겨 혼란스러운 세상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이를 틈타 흑마신들이 인류를 노예로 삼기 위해 침입하고, 두니아의 후손들은 그에 맞서 흑마족과 전쟁을 벌인다. 그렇게 2년 8개월 28일 밤, 천 날 밤 하고도 하룻밤에 걸쳐 이어졌던 위기와 혼란의 시대에 대한 기록이 이 책의 이야기이다.

 

<한밤의 아이들>로 오래 전에 만났던 살만 루슈디의 신작이다. '구전과 역사, 전통과 신화 등 옛날이야기를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천부적인 입담으로 풀어내는 우리 시대의 셰에라자드'라는 호칭이 전혀 과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이 흐른 후 우리의 후손이 21세기를 되돌아보며 서술한 연대기 형식이라 31세기에 바라본 우리의 모습을 상상해보도록 만들어준다. 천일 밤 동안 끊이지 않는 이야기, 천일야화처럼 살만 루슈디의 특유의 상상력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종교와 철학, 역사를 넘나드는 이 환상적인 이야기는 우리가 왜 현실에서 벗어나 상상하고, 허구를 만들어내는 지에 대한 살만 루슈디 식의 대답이기도 하다. '우리는 수업이 되풀이되며 입에서 귀로, 귀에서 입으로, 그렇게 우리에게 전해진 이야기를 하며' 살아가는 생물이니 말이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 우리가 알 수 없었지만 결국은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위대한 이야기꾼이 생사를 걸고 들려주는 현대판 천일야화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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