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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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날을 걱정하는 건 태평성대에나 할 짓이다. 전시에는 그날 안 죽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걸 모르면 그걸 아는 자의 짐이 되기 십상이다. 세상이 바뀐 후의 걱정은 그때 하면 되는 것이지 지금 급한 건 이 세상에 어떻게 안 죽고 살아남나였다. 우리는 먹을 것도 달랑달랑한 상태였다. 남은 식량을 늘여 먹기 위해 올케와 나는 이미 굶주리고 있었다. 오빠는 빈말로라도 그런 걱정 한마디 없이 언제 닥칠지 모를 앞날을 예습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p.23~24

 

이야기는 다리에 총상을 입은 오빠의 다리를 치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총구멍에 심을 갈아 끼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자신도 모르게 오싹한 생각을 하고 만다. 총구멍이 차라리 심장을 관통했더라면.. 그랬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무사히 피난길에 올랐을 텐데..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 오빠, 조카와 올케로 구성된 '나'의 가족들은 인기척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서울에서 살아 남아야 했다. 인민군이며, 중공군, 빨갱이 등 낯선 단어들이 일상이 된 이 시기는 1951년, 전쟁 직후였다. '나'는 자신이 그곳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분하고 억울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스무 살의 그녀에게 당면한 과제는 그저 살아 남는 것, 고통을 견디고 버티는 것뿐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해 남은 식량을 늘여 먹기 위해 굶주리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세상이 바뀐 후의 걱정보다는 당장 어떻게 안 죽고 살아남느냐가 문제였을 것이다.

 

전작이 어린 시절부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미성년 시절을 그렸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스무 살부터 결혼 때까지 성년의 삶을 그리고 있다. 어린 시절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아버지의 역할을 할아버지가 대신해 주었고, 사춘기 이후에는 오빠가 그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오빠의 존재는 사뭇 달라졌다. 1.4 후퇴를 배경으로 시작된 서두부터 '나'에게 오빠의 존재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오빠는 인민군에 끌려갔다가 도망쳐 온 뒤, 거의 폐인처럼 되어 버렸다. '나'는 그런 오빠의 모습을 보며 '표정도 과묵하던 때의 준수한 모습은 간데없이, 소심하고 비루해지고 있었다'며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싶어 한다. 보호를 받고 의지할 존재가 사라졌으니, 이제 자신이 보호자가 되어 엄마와 오빠를 보호해야 하는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이 작품은 '나'가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과 부딪치고, 가족을 보호하며 겪은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부엌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 마당에서 펌프질하는 소리, 아이가 칭얼대는 소리, 여자들이 두런거리다가 킬킬대는 소리, 밥이 뜸 드는 냄새, 그리고 우리 집 된장만의 그 구뜰한 냄새, 이런 것들이 서로 어울려 집 안을 자욱하게 채우고 있었다. 아, 이 자욱함. 그건 음향이나 냄새가 아니라 생활이요, 평화였다. 그러나 현실일 리는 없었다. 나는 행여나 그 달디단 자욱함이 샐까 봐, 꿈에서 깰까 봐, 이불을 꼭꼭 여미고 비몽사몽간의 몽롱한 시간을 즐겼다.      p.130

 

박완서 작가의 타계 10주기를 기리며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책들이 출간되었다. 이번에 만난 것은 연작 자전소설 두 권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1992년에 출간되었고,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1995년에 출간되었으니 20년이 훌쩍 넘었다. 연작 자전소설 첫 번째 작품에서는 1930년대 개풍 박적골에서의 어린 시절과 1950년 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에서의 스무 살까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번째 작품에서는 1951년부터 1953년까지의 이야기로 전쟁의 생생한 현장과 스무 살 이후 결혼할 때까지 성년의 삶이 그려져 있다. 화려한 꽃무늬 패턴이 인상적인 이번 개정판에는 기존 작품 해설 외에 정이현 작가, 김금희 작가의 서평과 정세랑 작가, 강화길 작가의 추천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소설의 시대 배경인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작가 박완서 사진이 엽서로 포함되어 있어 더 의미가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내가 살아 낸 세월은 흔하디흔한 개인사에 속할 터이나, 그 부분은 개인사인 동시에 동시대를 산 누구나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자, 현재의 잘사는 세상의 기초가 묻힌 부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현재 세상의 변화 속도가 하도 눈부시고 망각의 힘은 막강해, 글을 쓰면서도 문득문득 정말로 그런 모진 세월이 있었을까 자신의 기억력이 의심스러워지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는 사라진 것들을 감쪽같이 잊어버리고 산다. 세상은 숨가쁘게 변해가고, 우리는 일상을 하루하루 살아내느라 바빠 가끔은 정말 거기 그런 게 있었을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기억을 믿을 수 없어지기도 하니 말이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전혀 겪어 보지 못한 세대인 나 같은 독자조차 작가가 들려주는 인간적이고, 진실된 이야기 속에 푹 빠져 들어 당시의 시대를 직접 경험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이는 우리가 지금 다시 박완서의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하기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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