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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유년의 기억,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ㅣ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평점 :
서울 아이들의 장난감보다 자연의 경이가 훨씬 더 유익한 노리갯감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일종의 호들갑일 뿐, 그 또한 정말은 아니다. 우리는 그냥 자연의 일부였다. 자연이 한시도 정지해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고 변화하니까 우리도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농사꾼이 곡식이나 푸성귀를 씨 뿌리고, 싹트고 줄기 뻗고 꽃피고 열매 맺는 동안 제아무리 부지런히 수고해 봤자 결코 그것들이 스스로 그렇게 돼 가는 부산함을 앞지르지 못한다. p.30
박완서 작가의 타계 10주기를 기리며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책들이 출간되었다. 이번에 만난 것은 연작 자전소설 두 권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1992년에 출간되었고,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1995년에 출간되었으니 20년이 훌쩍 넘었다. 연작 자전소설 첫 번째 작품에서는 1930년대 개풍 박적골에서의 어린 시절과 1950년 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에서의 스무 살까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번째 작품에서는 1951년부터 1953년까지의 이야기로 전쟁의 생생한 현장과 스무 살 이후 결혼할 때까지 성년의 삶이 그려져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순전히 기억에 의지한 소설'이라 말하며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만큼 인간적이고, 진실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독자 입장에서는 당시의 시대를 직접 경험하는 듯한 느낌도 드는 그런 작품들이다. 개성에서 남서쪽으로 이십 리가량 떨어진 시골에서 태어난 '나'는 양반집안에서 자라며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아버지를 여읜 것이 세 살 때라 할아버지가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엄마는 어른들과 상의도 없이 오빠를 서울의 상업학교에 보냈고, 그로 인해 나만 시골에 남겨지게 되었지만 든든한 할아버지 비호덕분에 따뜻하게 어린 시절을 보낸다. 이후 시골을 떠나 서울에 와서 도시 아이들과 어울리며, 공부를 많이 해서 신여성이 돼야 한다는 엄마의 바람대로 조금씩 성장해나간다. 1930년대의 풍경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는 동안 마치 그림처럼 눈앞에 그려지는 이야기가 실제 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우리가 가진 양식은 너무 적었고 어느 세상에서나 목구멍은 포도청이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짓에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쌀은 없고 잡곡 한 움큼과 밀가루가 반 자루가량 남아 있었다. 저녁은 새로 짓지 않고 남기고 간 찬밥으로 때웠다. 군불도 뜨근뜨끈하게 지폈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날 건덕지가 없을 지경까지 몰렸을 때의 평화로움 안에서 우리는 깊은 숙면에 빠졌다. p.310
화려한 꽃무늬 패턴이 인상적인 이번 개정판에는 기존 작품 해설 외에 정이현 작가, 김금희 작가의 서평과 정세랑 작가, 강화길 작가의 추천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소설의 시대 배경인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작가 박완서 사진이 엽서로 포함되어 있어 더 의미가 있다. 작품의 제목에 포함된 '싱아'는 시골에선 달개비만큼이나 흔한 것으로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는 풀이라고 한다. 그러니 싱아란 시골에 살았던 '나'에겐 겉껍질을 벗겨 내고 먹었던 새콤달콤한 맛의 기억이자 당시의 풍경을 떠올리면 지천에 존재했던 추억의 상징이기도 하다. 서울에 살면서 느꼈던 향수의 대상이자 순수했던 유년 시절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나'가 도서관이라는 장소에서 처음으로 빌려 본 책이 <레 미제라블>이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물론 아동용으로 쉽게 간추려진 작품이었고, 일본말로 되어 있었지만 삽화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워 익는 재미에다 황홀감을 더해 주었다고 하니 궁금해지기도 했다. 유년 시절에 읽었던 책들에 대한 기억은 성인이 되어서도 꽤 많은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이 작품은 서사 자체도 재미있지만, 작가의 실제 유년 시절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특별한 선물처럼 느껴져서 더 좋은 것 같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아주 어릴 때 처음 만났었는데,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을 때 훨씬 더 글맛이 제대로 느껴진다고 할까. 지금 읽을 때 그 매력을 더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수십 년이 더 지나도 여전히 다시 읽힐, 한국 문학의 진짜 고전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