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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는 언제나 검은 옷을 입는다
파올로 코녜티 지음, 최정윤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월
평점 :
미지근한 거품 덩어리가 그녀의 몸을 덮는 것처럼, 어느덧 잠이 쏟아졌다. 소녀는 무척 강력하고 균형 잡힌 팀과 무척 약하지만 뛰어난 챔피언이 속해 있는 팀과의 대결을 관전했다. 아이는 강력한 팀의 선수 역할을 했고 동시에 다른 팀의 챔피언이자 흥분한 해설자, 심지어 골에 열광하는 관중이 되기도 했다. 그 순간 소녀는 달콤하면서도 우울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녀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자신으로 살지 않는 매혹적인 삶의 방식이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그러기엔 늦었다. 그건 영원히 가지 않은 길이 되고 그녀는 재능을 썩히고 말 것이다. p.60
임신 7개월인 스물두 살의 산모가 상당한 출혈을 하며 청색증의 자그마한 아기를 출산한다. 산모는 임신 중에 먹지 말아야 할 궤양 약을 몰래 먹었고, 아기는 숨을 쉬지도 울지도 않는 상태였다. 아기의 아버지는 지치고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기를 보러 하루에도 몇 번씩 병원을 오갔다. 응급 출산을 도왔던 간호사는 인큐베이터 옆에 앉아서 밤마다 아기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피아. 태어나는 게 뭔지 아니? 전쟁터로 떠나는 배와 같은 거야." 그날 아기는 위기를 넘겼고, 마침내 엄마 곁으로 돌아간다.
자동차 엔제니어인 아빠와 미술학도 엄마는 성향이 너무도 달랐다. 하지만 그들은 이혼이 아니라 이사를 선택한다. 밀라노를 떠나서 먼 도시 외곽으로 떠나 새로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덟 살의 소피아는 벌써 여러 차례 부모님이 싸우는 것을 봤고, 두 분이 사이좋게 지내길 바라며 기도한다. 열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소피아의 탄생부터 어린 시절을 거쳐가며 성장해나가는 서사를 큰 줄기로 하고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소피아의 주변 사람들 시선으로 전개된다. 소피아가 계속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인공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게 아니라 간접적으로 그녀의 삶에 영향을 주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지는 것이다. 소피아는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주변인으로 스쳐 지나가기도 하며 이야기를 완성시켜 나간다.
“내 생각에.” 아빠가 말한다. “네가 관계에서 지나치게 많은 기대를 하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
“뭐가 지나치다는 거예요? 약간의 사랑이 아빠 눈에는 지나쳐 보여요?”
“사랑이 지나치다는 게 아니라 네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지나쳐 보인다는 거야.”
“제가 뭘 어떻게 표현한다는 말씀이세요?”
아빠는 한숨을 쉰다. “누군가에게 함께 있는 것을 요구할 수는 있어. 하지만 그 사람의 인생과 네 인생을 하나로 합치지 않고 말이야. 사랑한다고 그런 것을 요구한다면 모두가 너를 실망시킬 거야.” p.184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가족들과 친구들, 직장동료, 첫사랑, 힘들 때 도움을 주었던 이들도 있을 테고, 내가 빛나던 순간에 함께 해준 이들도 있었고, 배신과 상처를 주었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만나온 많은 사람들은 모두 크든, 작든 내 삶에 흔적을 남긴다. 그들로 인해 상처받고, 힘들어하고, 행복하고, 도움을 받고, 위로를 받으며 우리는 오늘도 하루를 살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소피아는 어린 시절 끝을 생각하는 놀이를 자주 하곤 했었다. 모든 관계를 시작할 때 애써 이런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다. 어떤 남자가 키스를 하는 동안 그것이 사과하는 것인지, 그럼 잘 가라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걷어 차 버리는 것인지, 친구로 지내자는 것인지 말이다. 읽지도 않은 책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러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져서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피아는 온몸에 피어싱을 하기도 했고 머리를 알록달록 물들이고 장례식장에나 갈 법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결국 그 모든 과정을 거쳐서 배우가 되는데, 이유는 배우라는 직업이 꼭 자기 자신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시작되었던 소피아의 삶은 로마의 영화학교로, 미국의 뉴욕으로 이어진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로 구성된 보통의 가족이 가질 수 있는 평범한 불행들이 꼭 불행한 결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각자 자신만의 고통과 우울과 불안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