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 팜
조앤 라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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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 리사가 자기 생각을 표현하려고 사용하는 단어다. 리사는 늘 골든 오크스에 대해, 그러니까 임신을 외주화한 의뢰인에게 만족을 제공하려는 골든 오크스의 기념비적인 노력에 대해 악의에 찬 농담을 해댄다. “저희의 목표는 여러분께 기쁨을 드리는 겁니다!” 리사는 히죽히죽 바보 같은 미소를 띤 채, 마치 견습 수녀처럼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조아리는 시늉을 하며 조롱한다. 기쁘으-음을 드리는. 그녀는 그 단어를 꼭 아이스크림 같은 느낌으로 발음한다. “왜냐하면 아기를 갖는 것은 기쁘으-은 일이어야 하니까요!”   p.155

 

아기를 낳은 지 4주가 된 제인은 딸 아말리아를 볼 때마다 엄청난 애정에 압도되어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가난한 싱글맘이었던 그녀는 다른 필리핀 이민 여성들과 함께 퀸스의 합숙소에서 지내고 있다. 몇 주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시부모와 함께 아파트에 살고 있었지만, 그에게 애인이 있고 그의 가족들 모두가 여러 달 동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고는 아기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그녀의 사촌인 아테가 자신의 침대 위 2층 자리에 대한 석달치 임대료를 선불로 내주었다. 합숙소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필리핀 사람들이었고, 상당수는 고향에 자식을 남겨두고 온 어머니들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유일한 아기인 아말리아와 함께 생활하기란 쉽지 않았고, 제인에겐 앞날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생아 보모로 일하는 아테가 아기를 돌보다가 쓰러졌고, 제인이 대신 보모 일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완벽한 상류층의 삶을 경험하고 두 배로 측정된 급료를 받고 처음으로 자신도 목돈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작은 실수로 해고 되고 몇 달 동안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게 된다. 그때 아테는 제인에게 여성을 대리모로 고용하는 골든 오크스라는 곳을 소개해준다. 호스트로 선택되면, 쉬면서 몸속의 아기를 건강하게 지키는 것 말고는 아무 하는 일 없이 시골 한복판의 호화 저택에서 지내게 된다. 제인은 9개월 동안 자신의 몸을 빌려주는 대가로 매월 돈을 받고, 무사히 건강한 아기를 출산할 경우 궁핍한 삶을 완전히 바꿔줄 거액의 보너스를 보장받는 계약을 맺게 된다. 그 동안 아말리아는 아테가 데리고 있으면서 보살펴 주기로 하고, 그녀는 대리모들을 위한 최고급 리조트에 입주하게 된다.

 

 

하지만 넌 이미 톱이지, 안 그래?
레이건은 배 속의 태아에 대해 생각한다. 유기농 식품으로 살찌고, 주문 생산 종합비타민으로 더 튼튼해지고, 유터로사운즈에 녹음돼 있는 다중 언어 재생 목록을 고려하건대 아마도 현시점에 3개 국어는 할 아기. 게다가 남자다. 더욱이 부유하기까지 하다.
어떻게 이 아이가 언젠가 세상을 지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267~268

 

베일에 싸인 골든 오크스의 의뢰인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뉴욕주 북부의 한적한 전원에 자리 잡은 ‘골든 오크스 농장’에는 전담 의사, 간호사, 영양사, 마사지사, 트레이너, 그리고 대리모인 ‘호스트’들을 돌본다는 미명하에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코디네이터 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식사, 명상, 운동, 진찰, 임신부 태교 수업 등 호스트들의 하루 일과는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의뢰인의 요청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호스트들은 외부로 나갈 수도 없고, 대부분의 경우 방문객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제인을 비롯한 네 명의 여성 화자들에 의해 진행된다. 골든 오크스를 총괄하는 중국계 혼혈인 메이, 제인의 나이 많은 사촌이자 20년 넘게 신생아 보모 일을 해온 아테, 그리고 제인의 룸메이트인 백인 여성 레이건이다. 레이건은 명문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물질적으로도 아무 부족함이 없지만, 아이를 출산할 수 없는 여성을 도와주고 싶다는 이상주의적 욕구와 강압적인 아버지의 도움 없이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현실적인 계산으로 대리모 일을 하게 되었다.

 

작가인 조앤 라모스는 우연히 한 잡지에서 인도의 대리모 서비스 광고를 접하고 이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닐라에서 태어나 여섯 살에 미국으로 이민 온 그녀는 그 동안 만나온 필리핀인 여성 가사 노동자들의 삶도 이 작품에 투영시켰다. 덕분에 계급, 인종, 이민에 대한 섬세하고도 현실적인 통찰이 돋보이는 소설이 탄생했다. 임신이 수익성 좋은 비즈니스가 되고, 여성의 몸과 아이가 거래의 대상이 되는 장소가 '농장'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는 설정만으로도 끔찍하지만, 더 소름끼치는 것은 이 소설 속 상황이 결코 상상의 산물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아시아 저개발국가 이민 여성들의 삶을 너무도 리얼하게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고, 대리모라는 존재에 대한 윤리적인 딜레마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질문들을 던져주고 있는 작품이었다. 대리모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나라도 있지만, 대리모 사업이 합법인데다 심지어 권장되기까지 하는 나라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 이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일들이 당장 벌어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않을까.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는 디스토피아 작품이 궁금하다면, 이 소설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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