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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아이드 수잔
줄리아 히벌린 지음, 유소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11월
평점 :
우리의 무덤도 화재 때문에 움푹 팬, 바닥이 고르지 않은 경사진 구덩이였다. 우리가 거기 버려지기 오래전부터 블랙 아이드 수잔이 피어나서 화려하게 들판을 단장하고 있었다. 블랙 아이드 수잔은 버려져서 누렇게 뜬 땅에서 종종 제일 먼저 번성하는 탐욕스러운 식물이다. 치어리더처럼 아름답지만 경쟁심이 강하다. 빠르게 번식해서 다른 종을 몰아낸다. 끄지 않고 아무렇게나 던진 한 개비 성냥, 그 때문에 연쇄살인범 이야기에 영원히 새겨질 우리의 별명이 탄생했다. p.31
테사는 타브로이드 신문 일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던 스타이자 캠프 파이어 때 등장하는 공포 괴담의 주인공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블랙 아이드 수잔 네 명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운이 좋았던 단 한 명, 유골이 흩어져 있던 곳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채로 발견된 유일한 피해자였다. 열여섯의 테사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자들의 유골과 함께 살아 있는 채로 묻힌 채 발견되었다. 그녀가 발견된 공동묘지에 곳곳에 피어 있던 블랙 아이드 수잔 꽃 때문에 사람들은 희생자들을 '블랙 아이드 수잔'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18년 뒤,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살고 있는 테사에게 그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자신이 18년 전에 했던 증언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범인에 대한 집행이 한 달 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형 집행일이 다가오고, 테사는 혹시 무고한 사람이 사형수 감옥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야기는 십대 딸을 둔 엄마 테사의 현재 시점과 18년 전 블랙 아이드 수잔 사건의 생존자로 무사히 구출되고 난 뒤의 열여섯 소녀 테사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과거 시점의 대부분은 테사와 정신과 의사의 상담으로 진행된다.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었다가 회복하고,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어 버린 테사가 뭐든 범인에 대한 단서를 찾아 주기를 바라는 어른들과 이상하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소녀의 구도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긴장감 보다는 다소 모호하게 흘러간다. 이백여 페이지가 지날 때까지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제대로 드러나는 게 없으니 말이다. 현재 시점의 이야기에서는 유명한 법과학자와 사형수 전문 변호사와 함께 혹시 다른 범인이 있지는 않을까, 무고한 사람이 갇혀 있는 건 아닐까 하며 사건의 진실에 다가간다.
"좋아요. 당신의 괴물이 바로 지금 저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그가 자리에 앉았어요. 모든 것을 자백했어요. 당신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어요. 이름도 알고, 어디서 자랐는지, 어머니가 그를 사랑했는지, 아버지에게서 얻어맞았는지, 고등학교 때 인기가 많았는지, 개를 사랑했는지, 개를 죽였는지... 다 알고 있어요. 그가 바로 저기, 1미터 떨어진 의자에 앉아서 당신의 모든 질문에 대답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달라질까요? 당신을 만족시킬 대답이 있을까요? 기분이 더 좋아질 수 있는?"
나는 의자를 응시했다.... 나는 내 괴물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가 죽기를 원했다. p.268~269
수십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러서, 자신이 진범을 잡은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범인의 변호사와 협력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피해자의 심리는 복잡 미묘하다. 누군가 그녀의 집 창밖에 블랙 아이드 수잔을 심어 놓았고, 사실 그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사건 당시 테사의 단짝이었던 친구 리디아는 테사가 재판에서 증언한 이후 사라져버렸다. 테사가 입을 열면 리디아도 수잔으로 만들겠다는 협박의 편지가 있었다. 리디아도 블랙 아이드 수잔 중 한 명이 되어 희생당한 걸까. 아니면 스스로 자취를 감춰버린 걸까. 수잔들 중 두 명은 아직도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고, 그들은 테사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 준다. 마치 유령처럼 나타나서, 그녀에게 말을 건다. 과연 감옥 안에 있는 범인은 무고한 걸까, 그렇다면 진짜 연쇄살인범은 누구일까.
피해자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사람이 주인공이고, 그녀의 기억을 쫓아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 내는 구도라면 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가 진행될텐데, 사실 이 작품은 거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독자들이 어느 정도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게 되는 것은 전체 사백 삼십여 페이지 중에서 사백 여 페이지가 가까워졌을 때 즈음이다. 그 뒤로 반전과 의외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그 전까지 이어지는 전개는 다소의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우선 테사라는 인물 자체가 뚜렷하지가 않아 다소 흐릿한 색이라고 해야 할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것 같기도 하다가 정말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덕분에 서사는 굉장히 느릿하게 흘러 간다. 물론 후반부의 속도감과 예상치 못한 결말을 위해 이 모든 과정을 즐길 수 있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 될 것이다. 영화 <컨텐더> 감독으로 영화화 제작 예정이라고 하는데, 스크린에서 펼쳐질 이야기는 또 어떤 분위기일지 기대를 해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