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
안토니오 G. 이투르베 지음, 장여정 옮김 / 북레시피 / 2020년 10월
평점 :
품절


 

"진짜 죄송한데, 프레디, 저 열네 살이에요. 캠프 중앙로 저 끝에 가스실이 있고 매일같이 수천 명이 그곳으로 보내지는 걸 목격했는데, 그런데도 진짜 제가 아직도 소설을 읽으면서 충격받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 디타는 받은 책을 전부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망가지거나 찢어지고 낡은, 적갈색 곰팡이가 잔뜩 핀, 훼손되기까지 한 책들이었다. 그러나 이 책들이 없으면 수세기 문명을 거쳐 전해진 지혜가 그대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지리학, 문학, 수학, 역사, 언어... 전부 소중한 것들이었다. 디타는 목숨을 걸고 이 책들을 지켜낼 것이다.    p.47

 

아우슈비츠 수용소 제31블록에 작은 비밀 학교가 있었고, 거기 모여 너덜너덜해진 책 낱장을 모아 읽은 사람들이 있었다. 집이며, 재산이며, 인간의 존엄성마저 강탈당하고 당장 내일 죽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한 유대인들은 어째서 한 줌의 책처럼 쓸모 없는 것을 목숨 걸고 지켰을까. 이 책은 아우슈비츠에 실재했던 세상에서 가장 작고, 가장 위험한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폭력과 핍박,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내고, 그저 버티고 살아남는 것이 전부였던 사람들. 수용소에서 사람들의 유일한 관심사이자 목표는 생존이었다. 일단 몇 시간을 살아남으면 그게 하루가 되고, 그렇게 며칠을 버텨 또 일주일을 생존하는 것, 그냥 매 순간을 살아남는 것이었다. '산다'는 동사는 그렇게 현재형일 때에만 말이 되었다.

 

열네 살 디타는 가족들들과 프라하를 떠나 테레진 게토로, 또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수많은 희생자 가운데 하나였다. 역사상 모든 독재자며 폭군들은 이념과 상관없이 모두 책을 가혹하게 핍박했다. 책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들었기에, 위험했다. 아우슈비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치는 책을 금지하고 샅샅이 색출해냈다. 그 속에서 어린 소녀 디타는 유대인 지도자인 프레디 허쉬의 부탁으로 여덟 권의 책을 맡게 된다. 그 책들 때문에 가스실로 끌려갈지 모르는데도 디타는 책을 꼭 붙든 채 행복했던 유년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목숨을 걸고 보물처럼 숨기고 지킨다. 그렇게 디타는 아우슈비츠의 사서가 된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학교에 다닐 때는 많은 아이들이 책을 싫어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책은 마지 자석과도 같이 아이들을 홀리게 만든다. 제일 말 안 듣는 아이들조차, 말썽꾸러기에 장난칠 궁리만 하던 아이들조차 디타가 나타나면 본능과 호기심에 책에 자동으로 끌리는 것이다. 디타를 비롯해 많은 아이들은 책 한 권만 펼치면 그 순간만은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삶도, 나치의 끝없는 공포도 모두 다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이야기 속 세상을 경험하면서 수프 배식을 먼저 받겠다고 줄 선 사람들을 밀치거나 옆 사람 숟가락을 훔치거나 하는 이기주의가 만연한 가혹한 현실을 넘어서게 된다.

 

 

여기서 책을 놓칠 순 없다. 프레디 허쉬가 이런 상황에서 했을 법한 말을 디타는 떠올린다.
"노력이 많이 필요하단 건 알아요.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동안만이라도 아이들은 이가 들끓는 마굿간에 있는 걸 잊을 수 있고, 살 태우는 냄새를 맡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 시간만큼은 아이들이 행복해해요. 그것만큼은 확실해요."
마르케타는 마지못해 동의한다. "그렇지....."
"현실을 보면 분노와 혐오감만 느껴지죠. 우리에게 있는 건 상상력뿐이에요, 마르케타 선생님."      p.338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존엄성조차 지켜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이들이, 말 그대로 언제 죽을지, 앞으로 어떤 고통을 더 당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팠고, 뿌듯했고, 기뻤다. 작가인 안토니오 이투르베는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소설은 군화로 목숨을 짓밟고자 하는 자들의 잔인함이 단 한 순간도 들어서지 못하도록 튼튼한 장벽을 쌓아 올리며 타인에게 헌신한 모든 이에게 바치는 오마주이자 책에 바치는 오마주'라고 말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열네 살 소녀 디타 크라우스는 실존 인물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우슈비츠에서 숨을 거두었지만, 디타와 어머니는 살아남아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은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 프랑크가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1945년 4월 모녀는 마침내 해방을 맞았고, 이후 디타는 유대인 난민을 위한 학교를 세웠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우슈비츠 집단학살 수용소 내에 있었던 아이들의 비밀 도서관에 대한 내용은 알베르토 망겔의 <밤의 도서관>에서도 짧게 언급된 적이 있다. 그곳 도서관에는 종이책이 단 여덟 권 있었고, 살아 있는 책도 여섯 명 있었다. 살아 있는 책이란, 책이 살아 있다는 게 아니라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얘기이다. 책이 금지된 끔찍한 곳에서 도서관이 존재했다는 것도, 그토록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일을 열네 살 어린 소녀가 맡아서 해냈다는 것도 사실 믿기지 않는다.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란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건 사실 빵과 물이고, 문화는 인류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빵과 물만으로는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없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지 않는다면, 눈을 감고 상상력을 펼치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무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완전한 인간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책이라는 것이 누군가에는 하찮은 구석이 있는 무용한 물건일수도 있겠지만, 생각 이상으로 훨씬 중요한 물건이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준 뭉클한 이야기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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