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름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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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렇게 불길한 걸까? 시간은 멈추지 않고 이런저런 일들이 벌어지며 인생은 완벽하게 밀폐된 방에서도 계속 움직이면서 가장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변화할 것이므로? 현재 모든 것이 완벽하므로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면 분명 나쁜 쪽의 변화일 거라는 불안감. 그래, 그거였다. 행복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아서 차라리 얼음을 깨트리고 찬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물에 빠질 때까지 불안해하며 하염없이 기다리느니 차라리 찬물에 빠져서 물에서 나오려고 싸우는 편이 나았다.    p.99~100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시를 사랑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라고 소설이 있는 것이니까. 매번 책장을 넘길 때면 우리는 어떤 세상 안에 살게 된다. 다시 또 책장을 넘기면 또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 작가는 한 문단, 한 문구, 흔한 단어 하나로도 독자들을 전혀 다른 세계로 데려갈 수 있다. 단어가 쓰인 방식, 경계를 무너뜨리는 상상의 힘, 탄탄한 플롯과 매혹적인 인물 등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요 네스뵈는 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발코니에 선 남자'를 읽고 스톡홀름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 역시 해리 홀레 시리즈를 8년 째 읽으면서 오슬로와 사랑에 빠졌다. 내가 본 적 없는 것, 가 본 적 없는 곳들이 매우 사적이고 익숙한 곳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작품 속 인물이 실제 사람이 되어 페이지 바깥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더라도 내겐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해리 홀레는 최악의 상황을 연이어 겪으며 지치고 피폐했던 모습이었다. 눈동자는 충혈됐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 빡빡 깍은 금발 머리에 192센티의 거대한 몸은 비쩍 마른 북극곰처럼 살이 빠져 근육질 몸에 지방만 쏙 빠진 상태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알콜 중독 상태였다. 그럼에도 사건 수사에 있어서 만큼은 융통성 제로, 고집 불통, 그리고 진실을 향한 무조건 적인 직진, 시니컬 하고 반항적이고, 무심한 듯 보여도 살인 사건 앞에서는 언제나 세상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계산 없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해리 홀레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막무가내식, 독불장군식이지만 사람 냄새 나는 캐릭터성에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오히려 불안정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정말 살아 숨쉬는 캐릭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박쥐>에 등장하는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 형사인 해리 홀레는 32살이었다. 풋풋하고 열정 넘쳤던 그는 노르웨이 여성이 호주에서 사체로 발견되어 호주로 출장을 가게 되고, 출발전 금주 상태였으나 호주에서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바퀴벌레>에서 33살의 그는 찌는 듯한 더위의 방콕에서 사건을 은폐하려는 철벽방어를 뚫고 노르웨이 대사의 살인 사건을 수사했다. <레드브레스트>에서 35살의 그는 미국 비밀경호원 총격사건으로 경위로 승진해서 국가정보국으로 발령을 받았고, <네메시스>에서는 은행 강도 사건과 전 여자친구의 자살 사건에 전작에서 죽은 동료에 대한 의혹을 수사하다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기도 했다. <데빌스스타>에서 36살의 해리 홀레는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이단아로, 경찰청의 외톨이이자 심각한 알콜 중독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즈음에 이미 자기파괴적인 성향 속으로 파고 들어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로, 우리는 더 이상 경찰이 아닌 해리 홀레의 모습까지 상상해봐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오슬로 3부작을 거치면서 그는 외톨이에 술고래,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이단아로 사람들에게 보여진다.

 

<리디머>에서는 해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두 인물이 사라지게 되는 시기를 거치며, 그가 완전히 마음의 문을 닫고 고독에 빠지게 되는 과정이 그려졌다. <스노우맨>과 <레오파드>를 거치며 전대 미문의 연쇄 살인범을 만나 손가락을 하나 잃어 버리고, 얼굴 절반이 찢어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여인과 그녀의 아들이 연쇄 살인범 손아귀에 들어가기도 하고,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운명의 연인 라켈 역시 도망치듯 그와 헤어지게 된다. <팬텀>에서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상처받고, 사상 최악으로 망가지는 해리 홀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폴리스>에서 해리 홀레는 경찰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오랜 연인 라켈과 마침내 결혼을 한다. 그리고 3년 뒤의 이야기가 이번 신작 <목마름>이다.

 

 

“모르겠어. 내가 아는 거라고는 살얼음판 같은 행복 위를 걸을 때 무섭다는 거야. 어찌나 무서운지 어서 끝나기를, 그냥 물속에 빠지기를 바라지.”
“그래서 우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한테서 도망치는 거예요.” 카트리네가 말했다. “술. 일. 무심한 섹스.”
우리가 쓸모 있는 일, 해리는 생각했다. 그들이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동안.  
"우린 그들을 구할 수 없어요." 카트리네가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그들도 우리를 구할 수 없고요. 오직 우리만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어요."      p.491

 

혼자 사는 여성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목에는 물린 자국이 있었고, 시신에선 피가 모자란 상태였다. 쇠이빨로 피를 마시는 범인을 언론에선 일명 '뱀파이어병 환자'라고 부르기 시작하고, 데이트 앱인 ‘틴더’로 남자를 만난 여자들이 살해되기 시작한다.  경찰청장 미카엘 벨만은 곧 법무부장관 자리가 내정된 상태였기에, '뱀파이어 살인마' 사건을 빨리 해결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은 경찰이 아닌, 해리 홀레를 찾아간다. 라켈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경찰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살고 있는 행복한 해리 홀레의 모습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시리즈가 거듭될 수록 해리는 언제나 소중한 뭔가를 잃어 왔고, 그러면서 점점 어둠에 잠식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왔으니 말이다. 미카엘은 해리를 협박해 수사를 맡게 하고, 해리는 결국 전대미문의 살인마와 마주하게 된다.

 

 

행복한 해리 홀레의 모습은 작가에게도, 독자들에게도 낯설었지만, 해리 자신도 얇은 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말할 정도로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그 행복이 깨져 버릴 까봐 더 조마조마 하는 마음으로 읽게 되는 것도 있었다. 해리 역시 그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고, 가족과 평온한 일상을 지켜내고 싶다. 시리즈가 지속되는 내내 고통받고 분노하고 상실감에 휩싸였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았던 그였는데,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지켜내야 하는 존재가 생겼고, 그것을 잃을 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뼛속까지 경찰인 해리에게는 범인을 잡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고, 뱀파이어 살인마는 그 안의 목마름를 일깨우고, 불을 지핀다. 그 불은 꺼질 때까지 계속 타오르면서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이다. 그 동안 그래 왔듯이. 해리는 이번에도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과 자신과 주위 사람들이 희생을 치를 줄 알면서도 살인자를 쫓는 일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해리는 자신이 겨우 찾은 행복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가 범인을 잡고 사건을 해결하리라는 것에는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지만, 해리의 평온한 일상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 지에 대해선 독자로서 불안했다. 피를 갈망하는 범인의 목마름만큼이나 범죄에 이끌리는 해리의 목마름은 강렬하다. 우리는 누구나 뭔가를 갈망하면서 살아 간다. 단지 그 대상과 정도만 다를 뿐이다. 누군가는 그것에 목숨을 걸고, 자신을 던지기도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해리에게는 행복 추구가 삶의 원동력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뭘 위해 살아 가는가. 어쩌면 우리 모두 속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해리 홀레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그 진실을 알고 싶다면 지금 당장 해리 홀레 시리즈를 만나 보자. 순서에 상관없이 어떤 작품부터 읽어도 상관없다. 소설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재미와 함께 해리 홀레에게 치명적으로 중독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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