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이자벨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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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폴의 방으로 들어갔다. 1백 권이 넘는 책들, 다양한 종류의 펜들, 노란색 노트 더미들, 검정 수첩 예닐곱 권, 모눈종이, 아직 따지 않은 레드와인 네 병, 자두 술, 브랜드 두 병이 있었다. 폴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남긴 잔여물들을 보고 있자니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우리가 축적해온 모든 것, 우리가 맺어온 모든 관계들, 결국 우리는 이 모든 걸 두고 떠나야 한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운명이다.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남은 건 '지금 여기'뿐이다.    p.50

 

미국 중서부 지방에 있는 주립대학교를 조기 졸업한 스물한 살 샘은 하버드 로스쿨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가게 되었다. 그는 로펌에서 인턴 일을 하고 대학 도서관에서 서가 정리를 하며 외국에서 몇 달 동안 지내기에 충분한 돈을 모아두었다. 로스쿨에 들어가기 전 5개월 동안 파리로 여행을 떠난다. 6월부터 연방 법원에서 인턴으로 일할 예정이었고, 9월부터 로스쿨 생활이 시작되니 그 전에 파리 여행을 맘껏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샘의 어머니는 그가 열두 살일 때 암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무뚝뚝한 성격에 그다지 살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새 엄마인 도로시 역시 아버지처럼 과묵한 성격이었고, 언제나 그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었기에 그는 늘 외로웠다.

 

 

어느 날 그는 호텔 옆방에 묵고 있는 폴의 소개로 파리 시내의 서점에서 열리는 출판기념회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아름다운 프랑스 여인에게 한 눈에 반하게 된다. 번역 일을 한다는 그녀의 이름은 서른 여섯 살의 이자벨로 왼손 약지에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다. 하지만 샘은 밤새 홀린 듯 그녀 생각에 빠져 있다 다음날 이자벨에게 연락을 하고, 그녀의 작업실에서 오후 5시에 만나기로 한다. 그리고 그들은 격정적인 사랑의 감정에 휩싸이게 되지만, 애초에 두 사람은 생활도, 성격도 너무 달랐다. 이자벨은 부유한 남편과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샘과 자유롭게 사랑하면서 결혼 생활은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샘은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고, 그녀와 계속 함께하고 싶지만 자신은 몇 개월 뒤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결혼 이후에도 서로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연애하길 원하는 프랑스 여자와 열정과 사랑을 혼동하는 철없는 애송이이자,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미국 남자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소유하기 힘든 것일수록 소유하길 원한다. 원하던 걸 손에 넣게 되면 현재 주어진 것들이 원래부터 쉽게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뒤틀린 논리의 궤적과 진실을 왜곡시키는 거울들의 통로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모든 걸 잃게 된다. 진지하고 안정된 사랑이 아니라 손에 넣을 수 없는 몽상 같은 사랑을 뒤쫓게 된다.    p.214~215

 

우리가 연애를 할 때 가장 많이들 갖게 되는 착각이 바로 이것 아닐까. 바로 내가 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 사람은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것도 수십 년 넘게 구축된 성격이나 취향, 사고방식, 자아 등은 절대로 바뀔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마다 착각을 하곤 한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나로 인해 이 사람의 모습이 조금은 달라질 거라고. 그리고 바로 그런 믿음이 결국에는 관계가 파탄이 되는 시발점이 되고는 한다. 하지만 반대로 상대가 자신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랑에 대해 말하더라도 그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그 동안 쌓아온 가치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행동을 하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상대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관계는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다. 바로 이 작품 속 샘과 이자벨처럼.

 

 

기존에 만나왔던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들이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도 못할 만큼 엄청난 어드벤처를 느끼게 만들어준 화려한 스토리라인을 자랑했었더라면, 이번 작품의 플롯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프랑스의 기혼 여성과 파리에 여행 온 미국의 대학생이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주요 스토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에는 극적인 사건이나 놀라운 반전도 중요하지 않다. <모멘트>나 <리빙 더 월드>, <파리5구의 여인>이나 <비트레이얼> 등의 작품에서 보여 주었던 스펙타클한 모험과 화려한 플롯은 없지만, 대신 사랑에 대해 매우 솔직하고 파격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이상적인 상대를 만나 서로 절절하게 사랑하다 결혼하더라도 시간이 흘러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서로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더는 배우자에게 열정을 느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만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더라도 끝까지 절실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이다. 결혼과 가정에 대한 미국과 프랑스의 문화 차이에 대한 시각도 흥미로웠고, 흔히 ‘외도’ 혹은 ‘불륜’으로 치부되는 관계로 시작된 샘과 이자벨의 사랑이 대부분의 예상과 달리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도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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