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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네 플루드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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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뭐?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내가 뭘 알지? 남자들이 거짓말을 한다면 그 첫 번째 대상은 그들의 아내가 아닌가? 사람들은 수천 가지 이유로 가장 가까운 이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나? 나도 거짓말을 했다 - 어쩌면 자주 하는지도 모른다. 시구르에게도. 특히 시구르에게는. 나는 그에게 내 상담실이 잘되고 있다고, 겨울이라 환자를 찾기가 좀 어렵지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한다. 차고 위의 상담실에 있으면 외롭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      p.56

 

사라는 잠결에 남편이 나가며 인사하는 소리를 듣는다. 건축가인 남편 시구르는 주말 동안 친구 두 명과 함께 산장에 다녀오기로 했다. 심리치료자로 집에 상담실을 마련하고 일을 하는 사라가 금요일에 만나야 할 환자는 세 명이다. 그들 부부가 사는 집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 이곳 저곳 손 볼 곳이 많았고, 그들은 빨리 집을 개조하고 싶었지만 시간도, 예산도 부족해 아직 집안 여기저기가 리모델링 중인 상태였다. 사라가 환자 한 명과 상담하는 동안 시구르가 음성 메세지를 남겼다. 친구들과 산장에 잘 도착했다는, 그저 안부 전화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남편과 함께 있어야 할 그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시구르가 오겠다고 약속한 시간에 오지 않았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고. 그는 분명 오전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었고, 친구들에게 연락이 온 건 이미 저녁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자,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남편의 거짓말 혹은 실종에 대해서 아내가 느끼는 분노나 배신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남편의 실종 사건을 대하는 아내의 반응이 여타의 작품들과 확연히 다르다. 물론 그녀는 끊임없이 이상한 부분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고, 시어머니에게 연락을 하고, 언니를 찾아가 이야기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녀가 집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상을 보내고, 집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흔적을 통해 불안에 휩싸이게 만들어 남편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아내가 인정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무려 백 페이지 정도를 할애하면서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곧 실종 사건은 살인 사건이 되어 그녀에게 들이 닥친다.

 

 

누구나 사랑받고 존경받고 싶어 한다 - 인간이라면 당연한 거다. 하지만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투명인간이 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상대가 나를 봐주지 않는 것 - 그래, 그것도 나쁘다 - 하지만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 숲속에서 비명을 질렀는데 아무도 대답이 없다면, 비명을 질렀다고 할 수나 있을까?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는데도 남편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 일이 일어나기는 한 것인가? 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 나라는 그 작은 존재가 당신이 집과 침대를 공유하는 남자에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인가?     p.285

 

대단히 근사한 작품이다. 아마도 내가 읽었던 심리 스릴러 장르의 작품들 중에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당분간 이 정도 수준의 작품은 없지 않을까 싶었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사실 유사한 장르의 작품들을 너무 많이 읽어 왔기에,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초반 100~200페이지 정도만 읽어도 대충 답이 나온다. 이 작품을 끝까지 다 읽어야 할지 말지, 후반부의 내용이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유사한 플롯, 비슷한 구성, 평면적인 인물들과 깜짝 효과만을 노린 반전 등등.. 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가끔 정말 바쁜 경우에는 초반부만 읽고 중반부터는 대충 훑어 보기만 하고 리뷰를 작성하곤 했다. 실제로 스릴러 장르에서 '서스펜스'를 독자들에게 안겨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고, '심리' 스릴러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 작품들 대부분이 독자들에게 불안감과 긴박감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그 호흡을 끝까지 지속하지 못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다르다. 초반 100여 페이지가 지나기도 전에, 나는 앞으로 내가 이 작가의 작품을 계속 챙겨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헬레네 플루드는 실제 심리학자로 일하고 있으며 그녀의 전문 분야는 폭력성, 재피해자화, 트라우마와 연관된 수치심과 죄의식이다. 바로 그 '심리학자가 쓴 심리스릴러'라는 점 때문에 이 작품이 여타의 심리스릴러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매력을 발산하게 된다. 사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 초반에 극중 사라가 환자 세 명과 심리 상담을 하는 장면이 있다. 아직 남편의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오기 전이라 그저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녀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부모와 남자친구와 문제가 있는 열여덟의 베라, 부모의 이혼으로 과격한 옷차림에 뚝 떨어진 성적으로 엄마에게 반항 중인 크리스토페르, 게임에 중독되어 있어 부모님의 골칫거리인 트뤼그베. 작가는 이들 세 명을 대하며 사라가 생각하는 것들, 상담하는 과정들만으로도 독자들이 사라라는 인물에 대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그려내고 있다. 사실 줄거리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 아무 의미없을 정도로, 이 작품은 직접 문장들을 읽고, 그 분위기를 체험해봐야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스펜스로 가득하고,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며, 대단히 우아하고 뛰어난 문장으로 쓰인 작품이니 말이다. 내년에 출간될 예정인 작가의 다음 작품을 빨리 만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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