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지나가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3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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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그랬다면, 그는 종우를 희망이라 믿고 좀 더 버텼을지 모른다고, 버텨야 한다고, 일단 살아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자고 다짐했을 수도 있다고, 그 모든 것이....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가정, 그런 안개 같은 가정들, 매 순간 숨을 옥죄어 왔던, 그러나 감정의 차원에서만 세워지고 무너지길 반복했던 텅 빈 성전 같은 고통일 뿐이란 걸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민이었다. 누군가 어깨라도 잡아 주면 나도 지쳤어, 라고 자동으로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아무도 민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p.96

 

약혼자와 결혼이 깨지고 나서 회사를 나온 뒤 부동산중개소에서 일하는 민은 종종 버려진 가구점에 몰래 들어가 시간을 보낸다. 인스턴트 커피를 타서 마시며 고가의 원목 가구 사이를 걷는 한밤의 산책은 오로지 그녀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공간에 자신 외에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버지 덕분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다른 사람의 신분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수호 역시 곧 폐점될 그 가구점에 종종 들러 시간을 보낸다. 그곳은 수호의 아버지가 하던 가구점이었고, 사업 실패에 이어 얼굴 한쪽에 마비가 온 뒤 아버지는 칩거 중이었다. 영원히 팔리지 않을 판매용 침대에 누워 우는 여자와 아버지가 실패한 상가에서, 아버지가 만든 침대에서 스스로에게 문자를 보내는 남자. 그리고 곧 폐허가 될 그들만의 작은 피난처는 고립된 이들이 버려진 공간에서 잠시 나마 숨쉴 수 있는 시간이다.

 

민은 부동산중개소에서 일하게 되면서, 매물로 나온 집에 주인이 없을 때 몰래 들어가 그곳 주인의 삶을 짧게 나마 살아내곤 했다. 대학생, 헤어디자이너, 서점 직원, 요가 강사, 호프집 주인, 대형 마트 계산원, 휴대폰 판매원, 그리고 승무원. 그렇게 30분짜리 생애를 수집할 수 있는 그 직업이 민은 좋았다. 한 달도 못 버틸 거라 여겼던 중개사무소에서 1년 가까이 일해오고 있는 것도 타인의 삶을 살아보는 것이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명백한 범죄인 줄 알면서도, 그 집이 담고 있는 짧은 생애의 시작과 끝을 누리고 싶었다. 입대를 앞두고 있는 수호는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가족들 모두가 차례로 신용불량자가 되자, 우연히 피씨방에서 주운 신분증을 위장하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중이다. 남의 신분을 도용한다는 것이 합법의 테두리를 넘는 것이라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저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위로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독촉전화와 협박성 이메일을 피해 휴대폰을 꺼놓고 낯선 사람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그가 꿈꾸는 미래는 오로지 아버지처럼 살지 않는 것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은 노인이 되는 동안 결핍은 보완되고 상처는 치유되는 것, 혹은 삶이란 둥근 테두리 안에서 부드럽게 합쳐지고 공평하게 섞이는 것이므로 아픈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는 것, 그런 환상이 가능할까. 누군가 죽은 자리에서 누군가는 태어나는 방식으로 무심히 순환하며 평형을 유지하는 이 세상에서 꿈에서 본 죽은 노인을 기억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그러나 민에게 일러 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자명한 건 오직 하나, 미니 회전목마를 타기엔 민 역시 몸집이 너무 커져 버렸다는 것뿐이었다.     p.188~189

 

민과 수호는 곧 폐점될 버려진 가구점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수호는 곧 철거될 옥상 놀이공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함께 하며 연주와 조금 가까워지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만다. 약혼자와 함께 살 집까지 마련했지만 그의 일방적인 결별로 인해 상처 받은 민의 마음과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타인의 명의를 도용하고 세상으로부터 숨고 싶은 수호의 마음, 그리고 오직 돈을 벌기 위해 퇴근 시간도 없이 맹목적으로 일에 헌신하지만 결국 일자리를 잃어 버리게 되는 연주의 일상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을 통과한다. 이들 각자에게 여름은 위태롭고, 아프고, 힘들고, 겨우 버텨내야만 하는 계절이지만, 그럼에도 여름은 지나가고, 가을이 온다. 물론 여름 한철을 겨우겨우 통과한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마음에 남은 상처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통도, 믿기지 않을 만큼의 행복도, 결국 지나간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말이다. 민은 자신이 30분씩 경험했던 타인의 삶들이 기차처럼 칸과 칸으로 이어진 생애들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잠깐 거쳐온 중개 사무소 직원의 칸을 지나며 견디기 힘든 상실감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기차는 계속 앞으로 달려 간다. 고단하지만 묵묵하게, 끊어질 것처럼 위태롭더라도, 멈추지 않고.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내더라도, 어찌되었건 버텨낸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들 역시 곧 폐점될 가구점에서 생강차를 함께 마시고, 곧 철거될 옥상 놀이공원에서 맥주 캔을 나눠 마시며 잠깐의 위로를 받는다.

 

8월, 여름이 무르익어 깊어지는 시간, 그리고 여름의 끝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시간이다. 푹푹 찌는 무더위가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창문을 열어놓으면 선선한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불어온다. 매번 이상하게도 여름은 내게 그늘 한 점 없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부지런히 뛰어 다녀야했던 기억들을 잔뜩 안겨주곤 했다. 그래서 내가 여름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인생에서 의미 있는 챕터들을 꼽을 때 항상 여름이라는 계절이 포함되고는 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 젊은 남녀 역시 아마도 영원히 기억에 남을 만한 자신만의 여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계획에도 없던 다른 종류의 삶으로 빨려 들어가는 허약한 지점들이 우리의 인생에는 생각보다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당신에게, 이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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