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전쟁
이종필 지음 / 비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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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과거를 복원하는 게 생각만큼 어렵지 않을지도 몰라요. 쉽지는 않겠지만."
"그게 현실에서 가능하다고요? SF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아니고요?"
"이론적으로는요. 최근에 물리학자들이 제시한 이론 중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 우주를 기술하는 기본적인 함수의 개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건데요. 그렇다면 과거를 복원하기 위해서도 무한히 많은 정보가 필요하지 않겠죠. 이건 사실 인공 지능 기술 중 '딥러닝'이 왜 그리 성공적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아이디어입니다."    p.91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 이른 아침, 세종로 사거리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에 목 없는 시신 하나가 배달된다. 목격자들은 유유히 편대 비행하는 다섯 대의 드론이 동상에 자일을 걸고 유유히 사라졌다고 했다. 게다가 피투성이 시신의 복부에는 촘촘히 박힌 가느다란 핀들이 하나의 그림을 이루고 있었다. 피해자가 스스로 드론에 매달린 채 머리를 잘라낼 수는 없었을 테니 이건 명백히 살인사건이었다. 수도 서울의 한가운데에 보란 듯이 시체를 매달다니, 대체 누가, 왜, 어떻게 한 것일까. 시신의 몸에 새겨진 이미지를 분석하기 위해 인공지능 알고리즘 전문가이자 물리학과 교수인 조성환이 등장한다. 그리고 15일, 범죄는 청산되지 못한 아픈 역사로 이어지고, 사건을 풀어내는 중요한 열쇠는 물리학 이론에 있었다.

 

조성환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사건에 개입되었다는 심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폭우 속에서 전혀 머뭇거리는 순간 없이 시신을 배달한 드론의 움직임은 제아무리 달인이라고 해도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공지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거였고, 시신에 남긴 지문과도 같은 흔적인 그림 역시 인간의 작업물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는 가슴부터 복부까지 타카핀이 촘촘히 박힌 그림을 분석한다. 지문 감식 결과 밝혀진 사망자는 국정원에서도 감시하고 있었던 인물로 일본 야쿠자 조직과 관계가 있는 걸로 보였다.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연구진에게 야쿠자 자금이 들어갔다는 소문을 토대로 교토 대학교의 고바야시 연구그룹이 물망에 오른다. 일련의 혐의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 확보를 위해 그들은 최고의 인공지능 프로그램 ‘황진이’를 보유한 대명대학교 문혜진양자인공지능연구소를 찾아 심층 분석을 의뢰하게 되는데, 사건은 점점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홍경수는 말없이 재킷 속주머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펼쳤다. 그가 펼친 A4 크기의 종이에는 여인의 얼굴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이 장면을 실시간 중계로 지켜보던 성환은 깜짝 놀랐다. 현장에 있던 영란과 태형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은 피해자 이윤철의 가슴에 박힌 그림과 똑같았다.
"기초과학이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얘기를 많이들 하시는데, 양자역학이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만나면 이렇게 놀라운 일도 가능합니다. 여러분."    p.139

 

이 작품은 물리학자 이종필이 쓴 첫 장편소설로 최신 인공지능 기술과 양자컴퓨팅, 드론 등 근미래를 주도할 기술들을 흥미롭게 담아내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은 훌륭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과학을 소재로 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번 작품은 조금은 워밍업 같은 느낌도 든다. 역사 스릴러로 보기에도 살짝 아쉽고, 그렇다고 과학 이론으로 중무장한 SF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딱딱한 과학적 지식들이 꽤 많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고, 지루할 틈 없이 술술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는 점은 분명 장점이다.

 

만약 한국에서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 질까. 이 작품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 이제 우리에게 인공지능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들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인공지능하면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 같은 영화 속 초지능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고, 작가는 훨씬 더 평범하고 지루한, 그러나 꽤 쓸모 있는 녀석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아마도 작가가 과학과 사회와의 관계,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같은 주제들에 대해서 오랜 시간 생각해 왔기에 이러한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을 것이다. 과거와 미래, 과학과 사회 어떤 형태로든 만나고, 대립하고, 이어지는 그 과정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재미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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