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고 아리고 여려서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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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리고 아려서 차마 마주볼 수 없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노력이나 신념으로 이루려 하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수함, 하지만 그게 가슴에 아리게 느껴지는 것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녀를 이른바 '관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거의 그런 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단순히 멀리서 바라보는 것뿐이라면 유유히 바보구나, 라고 넘겨버리면 끝날 일이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그 순수함을 마주하자 내 쪽에서 그녀를 무시한다는 것은 적어도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p.24~25

 

대학 신입생 다바타 가에데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는 것도, 자신이 상대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도 싫어 되도록 타인에게 다가가지 않고 대학 생활을 보내기로 마음 먹는다. 수강 신청도 끝이 나고 드디어 본격적으로 강의가 시작되는 날, 일반교양 과목인 '평화구축론' 시간이었다. 의욕과는 달리 금세 따분하게 느껴지는 강의라 창문 너머를 내다 보던 중이었는데, 그를 비롯한 학생들을 집중하게 만든 것은 한 여학생이 강사에게 질문하는 목소리였다.

 

 

"이 세계에 폭력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로 시작된, 질문이라는 형식만 빌린 그녀의 주장은 초등학교 도덕 시간에나 나올 듯한 이상론이어서 듣고 있는 이들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든다. 가에데는 그녀를 보며 '세상에 저렇게 자신감 과잉에 바보같이 순진하고 둔감한 사람도 있구나' 싶어 어이없어 한다. 하지만 가에데는 먼저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는 야박한 짓은 못하는 성격이라, 어쩌다 보니 문제의 여학생, 아키요시와 말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 버린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채로 어느새 그녀를 만나고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그러다 보니 아키요시의 번거로움 속에서 한 가지 순수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되고 나니 자신이 먼저 그녀를 무시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렇게 친구로서 관계를 이어가다 보니 점점 그녀에게 휘말려 거창하게도 세계 평화를 위해 지금 당장 모든 무기를 내려놓자는 동아리 ‘모아이’를 결성하게 된다. 단둘만의 비밀결사로 시작했던 모아이는 가에데가 4학년이 되어 한창 취업활동으로 바쁘게 다닐 때 즈음에는 규모도 커지고 취업용 인맥 쌓기 동아리로 변질되고 만다.

 

 

지금의 모아이는 범용한 인간들이 취업 활동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도록 철저히 '나 자신이 아닌 것'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세속에 영합하고 자기 자신에게 베이킹파우더를 섞어 한껏 부풀리는 방법. 이상적인 나 자신을 지향하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그 자체를 모두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나 역시 그렇게 했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그런 자세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원래의 모아이가 아니다, 라는 것뿐이다. 백 명 단위의 강의실에서 단 한 명의 특출한 개성이었던 그 친구가 이상으로 삼고 만들었던 그 조직이 아니다.    p.196

 

현재의 모아이는 설립 멤버가 없어진 지금도 여전히 그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처음에 생각했던 조직과는 완전히 형태가 달라져 학교 안에서 득세하는 거대 단체가 되어 버렸다. 가에데는 취업활동으로 인해 파김치가 되어 있다가, 최종 면접을 보고 온 한 회사로부터 합격 소식을 전해 듣고는 그제야 잊고 있었던 모아이에 대해서 생각한다. 처음의 이상과는 너무도 멀어져 버린 왜곡된 단체를 없애고, 다시 한번 이상이 머무는 곳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모아이에서 밀려난 이후 그쪽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던 가에데는 악의 단체와 싸우는 비밀결사라도 된 듯 모아이와 싸워 보기로 한다. 과연 졸업 전에 그는 '이상을 추구하는 순수한 동아리'를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화제의 데뷔작을 썼던 스미노 요루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그는 데뷔작이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키던 시기에 이 작품을 처음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인공이 거대해진 모아이를 향해 투쟁에 나서는 것처럼 자신의 데뷔작에 대항해서 그 작품에 감동한 독자를 포함한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싶었다고, 작품의 의도를 밝히고 있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아이였을 때 가지고 있었던 순수함을 잃어 버리고, 대신 세상살이에 필요한 처세술을 배우게 된다. 그러니 대학 생활이라는 것이 아마도 그 순수성을 간직하게 되는 가장 마지막 시기가 아닐까. 졸업 후 취업을 하게 되면서 마주하게 되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어른'이 되기 위해 이상 따위는 점점 자취를 감추게 마련이니 말이다. 청춘의 찬란함과 잔인함을 치열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도 한때 있었을 그 순수함과 우리가 이미 겪고 지나온 그 시절을 다시 한번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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