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 룸
레이철 쿠시너 지음, 강아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살 계획은 없다. 그렇다고 짧게 살겠다는 것도 아니다. 내게는 그런 계획이라는 게 전혀 없다. 문제는 계획이 있든 없든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계획 따윈 무의미하다. 그러나 계획이 없다고 후회도 없는 건 아니다. 내가 마스 룸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소름 끼치는 커트 케네디를 만나지 않았다면. 소름 끼치는 커트 케네디가 나를 스토킹하기로 마음먹지 않았다면. 하지만 그는 마음먹었고, 그러고 나니 끈질겼다. 저 일들 중 어느 하나만 일어나지 않았어도, 콘크리트 구덩이 속 인생을 향해 달리는 버스에 타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p.26~27

 

마켓 스트리트의 마스 룸에서 스트립댄서로 일하는 스물아홉 싱글맘 로미는 자신을 몇 달 동안 스토킹한 남자의 머리를 타이어 공구로 내려쳤다. 남자는 죽었고, 체포된 그녀는 두 번의 종신형에 추가로 육 년을 선고 받는다. 약에 취해, 도서관 책들을 읽으며 보낸 몇 해를 후회하지 않았고, 옷을 벗어 버는 수입에 대해 전혀 나쁜 삶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마스 룸에서 일했고, 그 남자를 만났던 것을 후회할 뿐이다. 로미가 체포되었을 때 다섯 살이던 잭슨은 어머니가 데려가 보살피기 시작했고, 그녀가 구치소에 있으면서 재판을 거치는 동안 아들은 일곱 살이 되었다.

 

 

로미가 사선변호인을 둘 만한 돈이 없었기에 국선변호인이 배정되었고, 그는 그녀를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남자는 로미를 미행하고 지켜보고, 그녀의 쓰레기를 뒤져 알아낸 번호로 서른 통씩 전화를 걸고, 곳곳에서 불쑥 나타나 괴롭혔지만 법정에선 그 무엇도 다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담당 검사는 남자의 과거 행적들이 사건 당일 밤에 급박한 위험을 야기한 것은 아니었다고 판사를 설득했고, 배심원들에게는 스토킹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제공되지 않았다. 열두 명의 배심원들에게 알려진 것은 미심쩍은 도덕성을 지닌 젊은 여자가 강직한 시민을 죽였다는 사실뿐이었다. 결국 사건의 모든 정황은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녀의 삶은 스탠빌 교도소로 향하게 된다.

 

 

그 모든 후회의 말들. 저들은 당신의 삶이 한 가지, 당신이 이미 저질러버린 그 한 가지를 중심으로 맴돌게 만든다. 그리고 당신은 그 되돌릴 수 없는 일로부터 스스로를 성장시켜야만 한다. 저들은 당신이 무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를 원한다. 저들은, 당신 자신을 미워하게 만든다. 저들 자신이 곧 세상인 양 굴고, 당신이 그 세상을, 저들을 배반했다는 양 굴지만 세상은 그보다 훨씬 크다. 후회한다는 거짓말, 선로를 이탈한 삶이라는 거짓말. 무슨 선로. 삶이 곧 선로다. 삶 그 자체가 선로이고, 삶이 가는 곳이 곧 길이다. 삶은 제 길을 끊기도 한다. 내 길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p.514~515

 

가상의 공간인 ‘스탠빌 여자 교도소’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여성 범죄자들의 사연들은 허구의 이야기임에도 너무도 현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마약중독자인 부모 밑에서 자라 같은 처지로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여자, 상습사기죄로 종신형을 선고 받은 흑인 성전환자, 친구들과 중국인 유학생을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미성년자,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고 사망에 이르게 한 여자 등.. 이 작품은 그녀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인다. 작가인 레이철 쿠시너는 애초에 직업과 안정적인 주거와 적합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이들이 어떠한 종류의 자비도 허락 받지 못한 채로 교도소에 들락거리는 삶을 살게 된 과정에 관심을 가진다. 소외와 학대의 피해자들이 결국 범죄자가 되어 교도소에 오게 된다면, 그것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레이철 쿠시너는 범죄와 처벌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관심으로 캘리포니아 교정법제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교도소와 법원을 다니면서 어쩌면 가난과 폭력이 서로 맞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가난의 문제에는 눈감으면서 폭력의 처벌에는 열을 올리는 국가?사회?제도의 모순에서 이 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한 남자가 죽었다. 하지만 진짜 피해자는 죽은 남자가 아니라 그를 죽게 한 여자이다. 물론 세상은 그러한 진실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교도소에 도착한 첫날, 삼십칠 년 뒤에나 있을 가석방 심의의 기회 마저 날려버린다. 임신한 채로 수감된 어린 여자애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출산하려는 걸 도와줬다는 이유로. 과연 로미는 교도소의 생존방식을 터득해가면서 잘 버텨낼 수 있을까.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 레이철 쿠시너는 이 작품으로 맨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이 작품이 독특한 것은 주인공 로미의 사연에 집중하기 보다 교도소에 수감된 여자들의 다양한 삶에 대해 보여주는 것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 각자의 과거와 어떻게 범죄를 저지르고, 혹은 휘말리고 교도소에 오게 되었는지를 통해 캘리포니아 교정법제 전반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그녀들의 범죄를 미화하거나, 동정을 바라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 더욱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새로운 기회도, 상황이 달라질 거라는 희망도 없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