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라는 남자 비채×마스다 미리 컬렉션 4
마스다 미리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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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가 '불같이' 급한 우리 아빠. 빨리빨리 먹지 못하는 요리가 식탁에 나오면 곧잘 도중에 벌컥 성질을 부리고는 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선 잔가시가 많은 작은 생선은 거의 금지였다. 아버지가 잔가시에 부글부글하다가 결국 화를 내기 때문이다. 뜨거운 음식도 안 된다. 아버지가 빨리빨리 드시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은 매일 저녁 갓 지은 따끈한 밥이었지만, 아버지만은 언제나 어제 한 찬밥이었다. 따끈따끈한 밥은 빨리 먹지 못하니까 싫으시단다.     p.54

 

'아빠는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는 것이 아마 세상 모든 딸들의 감정 아닐까. 나와 수십 년 동안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함께 밥을 먹고 지낸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까운 존재이지만 가끔은 너무 먼 존재처럼 느껴지곤 하는 게 바로 '아빠'이니 말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의 대부분 아빠를 이해하지 못한 채 보냈다. 자주 버럭 하는 성격도, 엄마에게 다정하지 않은 태도도, 주말 아침마다 가족들을 강제 기상시키는 클래식 음악 취향도, 아빠가 싫어하는 음식이 식탁에 올라오지 않는 것도.. 그렇게 이런 저런 소소한 것들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무뚝뚝하고 애정표현에 서투른 그 모습 그대로의 아빠를 인정한다. 분명 어린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을 테고, 자식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아빠의 본 모습도 있었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이제는 그만큼 내가 어른이 되었고, 세상을 겪었으니 말이다.

 

마스다 미리가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난 뒤의 작품 <영원한 외출>과 <오늘의 인생>을 읽었기에, 오래 전에 쓰인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녀가 아빠와 함께한 일상과 추억들이 다 애틋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굉장히 특별한 사건이나, 엄청난 감정의 변화를 겪게 만드는 일들이 펼쳐지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매일 겪는 일상의 수많은 순간들을 떠올리게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창피했다. 아버지와 외출하는 게 어릴 때는 창피해서 싫었다. 길을 걷다가 예사로이 방귀를 뀌고, 가게에서 밥 먹다가 '이거, 맛이 별론데....' 같은 말을 한다. 목소리가 우렁찬 것도 난처한 점이다. 쇼핑하다 말고 점원의 태도가 나쁘다면서 벌컥 화를 내며 나가 버리는 일도 숱하게 있었다.... 어째서 대외용 얼굴을 하지 못할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같은 반 친구들한테 이런 아빠인 걸 들키면 창피해서 학교도 못 갈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래서 외출해서는 늘 아버지와 떨어져 걷고, 일행이 아닌 것처럼 굴었다.    p.96~97

 

마스다 미리는 이 책에서 아빠와 함께한 일상을 짤막짤막한 에세이와 만화에 담아 추억한다. 국내에는 2011년에 소개되었던 작품인데, 마스다 미리 작가의 제안으로, 산뜻한 표지로 옷을 갈아 입고 최대한 원문에 가까운 번역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찾는 물건이 눈에 띄지 않으면 늘 엄마 탓처럼 말하는 아빠, 외출했다 들어와도 자주 손을 씻지 않는 아빠, 딸이 아프면 걱정을 표현하는 일이 서툴어 언짢아하는 아빠, 성미가 급하고 주의 산만한 아빠, 잡학 상식을 좋아하는 아빠, 어쩐지 둘만 있으면 서먹서먹해지는 아빠와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가볍고 유쾌하게 그려져 있다.

 

 

뭐 맛있는 거 좀 없나~ 라며 수시로 간식을 찾는 아빠의 모습, 티비 프로그램을 보며 기어코 엄마한테 안 해도 될 말을 한마디씩 하는 모습 등 여느 집이나 아빠들의 모습은 비슷한 것인지 마스다 미리가 그려내는 아빠의 모습에서 우리 아빠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아빠의 모습에서도 장점도 있고, 좋아하는 부분도 있지만, 이런 사람이 애인이라면 절대로 싫다고 말하는 마스다 미리의 모습에 빵 터지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빠라면 괜찮지만, 애인으로서는 빵점인 남자, 아빠라는 존재는 참 알다가도 모를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들기도 했다. 이러나 저러나 나의 절반을 만들어 준 존재가 바로 아빠이고, 내 얼굴 어딘가 한 부분은 아빠를 닮았으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아빠의 성격 중 하나도 나에게 내제되어 있다. 따뜻하고, 코믹하게 풀어내는 만화와 에세이였지만, 읽으면서 지금은 세상에 부재하는 아빠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 너무 좋았다. 누구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아빠가 보고 싶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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