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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난 장미 인형들
수잔 영 지음, 이재경 옮김 / 꿈의지도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요즘 여자애들은 외모를 중요시하지 않아." 펜션트 교수가 훈계했다. "파자마 차림으로 영화관에 가고, 지저분한 머리로 슈퍼마켓에 가고." 그는 그런 부류의 여자애들이 역겹다는 듯 코를 찡그렸다. "하지만 너희는 자나 깨나 외모를 뽐내야 해. 어떠한 예외도 없이. 왜 그렇지?"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진 최고의 자산이니까요." 우리는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이 적절한 대답이라는 것을 아니까. 우리가 그걸로 점수 매겨진다는 것을 아니까. P.52~53
외딴곳에 고립되어 있는 사립 여학교 이노베이션스 아카데미에는 장미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소녀들이 있다. 소녀들은 방학 때도 집에 가지 않고 일 년 내내 교정에 갇혀 집중 교육을 받으며, 학교로부터 과한 보호를 받고 있다. 최근에 아카데미는 과목 수와 훈련 양을 늘리며 교육과정의 강도를 높였고, 그 상향 조정된 기준에 따라 선발된 열두 명의 소녀들은 최고의 재색을 갖추고 있었다. 필로미나는 현장학습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잠시 들른 주유소의 매점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학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이유로 사감에게 폭력적 훈계를 듣고, 밸런타인은 그에게 반항적인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충동억제치료를 받게 된다. 충동억제치료는 계도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판단될 때 받는 벌로, 보통 울면서 들어갔다가 24시간 후에 좋아져서 나오게 되는데 치료가 끝나면 기억이 알아서 지워져 어떤 치료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모두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 하는 과정이라 소녀들은 그저 학교와 관리자들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인 레논로즈가 사라지고 필로미나는 그녀의 방에서 작은 가죽 장정 책을 발견한다. '가장 날카로운 가시들'이라는 제목의 시집이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도 폭력적이고 분노가 어려있었다. 소녀들이 상황을 바꾸고, 자유를 얻고, 주도권을 잡는다는 식의 이야기는 생전 처음 읽어본 필로미나에게 그 책은 지금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어온 모든 가치관을 뒤흔들리게 할 만큼 강력한 충격을 선사한다. 그리고 자신이 매일 먹던 비타민이라는 이름의 캡슐에 뭔가 수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친구들에게 그에 대해 알리고, 함께 책을 읽으며 학교의 의심스러운 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그들이 교육받고, 갇혀 있고, 훈련 받는 방식에 대해서 지금까지 속아왔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착하고 상냥하던 소녀들이 스스로 깨어나 학교의 엄청난 비밀을 파헤치기 되면서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너는 시키는 대로 한다." 그가 읊조린다. "너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들에 감사한다.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몇 달 후 학교와 부모가 너의 미래에 대해 내리는 결정에 무조건 따른다. 너의 미래는 우리가 결정해. 너는 거기에 신경 쓸 필요 없어." 그가 말을 멈추고 허리를 굽힌다. 그의 얼굴이 보인다.
"너는 아름다운 장미야, 필로미나." 그가 말한다. 마치 그게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인 것처럼. "우리가 완벽하게 가꾼 장미. 너는 모든 남자가 꿈꾸는 트로피가 될 거야." P.267
사교 에티켓의 폭넓은 훈련을 통해 엘리트를 양성하는, 전국에서 가장 명망 있는 예비신부학교라는 설정부터 수상하기 그지 없는데, 이런 곳에 자녀들을 보내는 재력가 집안의 부모들 역시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소녀들은 매일 밤 사감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타민이라 불리는 약을 먹고 잠을 자고, 마치 화원 속의 장미처럼 남자들에 의해 배양되고 있다. '오직 아름다운 것들만이 가치 있다'고 부르짓는 교수들, 언제나 남자들이 기대하는 최고의 품행을 보여야 하고, 그들에게 상냥함과 정숙을 보여주는 아름답고, 공손하고, 순종적인 신붓감이 되는 것이 소녀들의 당연한 목표였다. 그녀들에게는 아카데미의 투자자들과 후원자들에게 '아름답고 순종적인 소녀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보여주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순응은 매력적인 자질이야. 사람들은 너희 의견을 반기지 않아. 입 다물고 듣기만 해. 이것이 모든 젊은 여자들에게 필요한 교훈이야.”라는 극중 교장의 말도 이상하지만, 그에 대해 아무런 의견이나 반항 없이 그저 순종하는 소녀들의 모습 또한 어딘가 비정상적이다. 그랬던 소녀들이 질문하기 시작하고,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그 모든 거짓과 기만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저자인 수잔 영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 특별한 헌사를 담았다. 이 책은 오랫동안 고통당하며 투쟁해온 소녀들을 위한 것이라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그녀들을 믿고, 함께 싸우겠다고 말이다. <시녀 이야기>의 계보를 이을 젊은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홍보 문구 만큼의 서사를 그리고 있지는 않지만, 이 작품이 오늘날 가장 논쟁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첨예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아름답고 비범한 소녀들이 세상을 향해 펼치게 될 반격을 만나 보자. 장미는 아름답지만, 그게 장미의 전부는 아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