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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 대하여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0년 5월
평점 :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뒤에는 새로운 사람, 동물, 꿈, 사건이 생기지 않는다(아주 어린 나이에 이렇게 되는 사람도 있다). 모두 전에 겪었던 일, 전에 만났던 사람이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날 뿐이다. 옷차림, 국적, 색깔이 달라졌어도 모두 똑같다. 모든 것은 과거의 메아리이자 반복이다. 슬픔도 없다. 순전히 죽음을 앞둔 아주 작고 마른 고양이 때문에 엄청난 괴로움, 외로움, 배신감 속에서 몇 날 며칠 눈물을 흘리던 오래전 기억과는 조금 다른 경험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p.34
수 세기 동안 미술가, 작가, 과학자, 철학자 등 수많은 남성들이 자신의 서재와 스튜디오를 고양이들과 공유해왔다. 찰스 디킨스, T.S.엘리엇, 레이먼드 챈들러, 어니스트 헤밍웨이, 무라카미 하루키 등 고양이에 매혹된 작가들의 명단만 해도 꽤 많다. 이들의 고양이에 대한 무한 애정 공세는 그들의 삶과 그 궤적을 같이 해 특별한 감동을 안겨 주는데, 공통점은 바로 고양이가 인간의 진정한 친구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반려 동물들은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무슨 일인지 귀찮게 물어보지 않고, 왜 그러느냐고 짜증나게 몰아치지 않고,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동물들이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고양이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고양이와 사람이 어울려 사는 당연한 풍경은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이 보여주는 고양이와 함께 하는 삶의 풍경은 조금 더 치열하고, 거칠다.
겉모습은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그 속에 영역과 서열을 다투고 짝 하나를 두고 경쟁하며, 때론 돌볼 여력이 없는 새끼를 미련 없이 버리는 모습들 또한 공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고양이들을 지켜보는 레싱의 다정함은 단순히 동물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삶을 살아가는 대등한 존재처럼 보여서 더욱 놀라웠다. 이미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우고 있던 상태에서, 길에서 데려온 한 마리까지 세 식구가 되어 살아온 시간을 그리고 있는 '살아남은 자 루퍼스'라는 글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고양이의 지능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인데, 루퍼스는 생존자의 지능을, 찰스는 과학적인 지능을, 장군은 직관적인 지능을 갖고 있다고 표현한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상처와 충격 때문에 데려온 지 사 년이 지나서야 레싱에게 애정 표현을 하는 루퍼스, 호기심이 많아 다양한 기계들에 관심을 가지는 찰스, 그리고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행동을 할지 직관적으로 알아차리는 장군까지.. 나는 이 고양이들을 실제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에 대해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싱의 고양이들에 대한 애정과 다정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글들이었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은 정말 대단한 호사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충격적이고 놀라운 즐거움을 맛보고, 고양이의 존재를 느끼는 삶. 손바닥에 느껴지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털, 추운 밤에 자다가 깼을 때 느껴지는 온기,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고양이조차 갖고 있는 우아함과 매력. 고양이가 혼자 방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우리는 그 고독한 걸음에서 표범을 본다. 심지어 퓨마를 연상할 때도 있다. 녀석이 고개를 돌려 사람을 볼 때 노랗게 이글거리는 그 눈은 녀석이 얼마나 이국적인 손님인지를 알려준다. p.264
이 책은 도리스 레싱이 1967년, 1989년, 2000년에 발표한 글을 한 권으로 엮은 산문집이다.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불행하게 보낸 유년 시절을 함께한 고양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작가로서 성공한 후, 당시 곁에 있었던 다리 하나를 잃은 늙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곁에 있어준 고양이들을 바라보는 레싱의 시선은 여타의 고양이 에세이에서 만날 수 있는 아기자기한 사랑의 그것만은 아니다. 특히나 그녀와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야생 고양이들에 대한 기억은 치열하고, 날 것 그대로의 생존 투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놀라웠다. 야생 고양이들의 수가 마흔 마리를 넘기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가족이 직접 살처분을 해서 개체 수를 조절할 수밖에 없었던 야만스럽고, 끔찍한 기억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참혹했다. 이렇듯 그 어떤 고양이를 다루고 있는 에세이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고양이'들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어 그들의 진짜 삶을 만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고양이들의 발정, 출산, 육아 등의 모습들 역시 사랑스럽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도, 특별히 싫어하는 편도 아니지만 우리 동네에서도 거의 매일 길고양이들을 만난다. 대부분의 길고양이들은 사람들을 피해 훌쩍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곤 한다. 길고양이들은 잘못된 속설 탓에 미움의 대상이 되어 왔고, 쓰레기봉투를 뜯고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로 잡혀가 안락사를 당하거나 텃밭을 파헤쳤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이제는 무심히 지나쳤던 길고양이들을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인간이나 고양이나 살아간다는 건 혹독하고 냉엄한 국면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과 고양이, 그 둘 사이에 놓인 벽을 넘으려 애쓰는 레싱의 따뜻한 글을 통해서 사람과 고양이가 공존하는 세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