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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 무루의 어른을 위한 그림책 읽기
무루(박서영)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5월
평점 :
이상한 것들은 자주 오해받고 소외된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 이상한 것에 마음이 끌린다. 그럴 때의 이상 異常 은 이상 理想 을 조금 닮았다. 두 '이상' 사이의 교집합 속에는 선한 이들이 각자의 보성대로 거리낌 없이 살아가는 자유가 있다. 노력의 방향이, 모두가 정상에 속하게 만들기보다는 누구도 어디에도 속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쪽으로 움직였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내 일상에도 많았으면 하고 바랐다. p.73~74
나는 어릴 때보다 오히려 오른이 된 지금 그림책을 더 많이 읽는 편이다. 어린 내가 좋아했던 것은 셜록 홈즈 류의 추리 소설과 당시 유행했던 공포 소설이었기에, 그림이 별로 없고 글씨가 많은 책을 자주 읽었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도 같은 장르의 책들을 좋아하지만, 그림책도 일부러 찾아서 읽는다. 감정과 이야기를 설명하는 대신 바로 보여주는 그림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림은 글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감정에 닿는다'고 말하는 무루의 말처럼, 글로 묘사하는 대신 단순한 색채와 음영, 비율, 질감 등이 보여주는 '시를 닮은 그림의 언어'가 나는 참 좋다. 그래서 등장 인물이 많고, 플롯이 복잡하고, 페이지 가득 글자들이 빽빽한 책들을 읽다가 잠시 덮어두고, 그림책을 펼치곤 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벌어질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그림책 속 일상에서, 세상 끝까지라도 가보고 싶어지는 무한 긍정의 에너지를,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 같은 기분을 끌어 올려주고 토닥여 주는 위로를 받곤 했다.
이 책은 '그림책 읽는 어른'으로 살아가는 저자 무루가 자신의 삶과 그림책을 엮어 내놓은 첫 에세이이다. 블로그와 SNS를 통해 생활과 사색의 기록을 단정히 쌓아오며 ‘무루’라는 이름을 알린 박서영 작가는 '모두가 정상으로 여기는 삶에서 비껴 나 현실보다는 이상을 사는 듯한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설명한다. 현실에 저항하고 판타지를 사랑하며 세상의 언저리에서 재미나게 살아가는 이상주의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떨지 궁금해진다. “나는 내가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나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사는 것이 무엇을 향해 가는 일인지 조금씩 더 선명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책을 읽는다는 건 작가의 세계 위에 내 세계를 겹쳐보는 일이다. 어떤 이야기도 읽는 이의 세계를 넘어서지는 못 한다. 내가 읽은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그때의 나만큼만 읽혔다.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는 동시에 읽는 수만큼의 이야기다. 한 사람이 지나는 삶의 시기마다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읽힌다. 좋은 이야기일수록 더욱 그렇다. 책등이 바랜 이 낡고 오래된 그림책 속에는 내가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해 외로울 때 나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p.174~175
이 책 속에서 무루가 읽어주는 그림책들은 내가 이미 읽었거나 알고 있는 작품들보다 모르는 작품들이 더 많았다. 다행히 마지막 페이지에 소개된 그림책 목록이 별도로 수록되어 있어,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나 무루가 어릴 때부터 삶의 시기마다 한 번씩 꺼내 읽었다는 셸 실버스타인의 책들은 꼭 찾아서 읽어볼 생각이다. 열 살 무렵에 처음 읽었던 책을 스무 살이 되어 다시 꺼내 읽었을 때 깜짝 놀랐다고 한다. 자신이 알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읽어본 진짜 이야기는 열 살에 읽었던 이야기와는 정반대의 결말을 보여주었다. 왜 그랬을까. 책을 읽는 사람이 꼭 자신의 세계만큼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책을 쉰이 되고, 예순이 되어 읽는다면 또 다른 말을 해줄 것이다.
비혼, 여성, 프리랜서, 집사, 채식지향주의자, 그림책 읽는 어른… 저자인 무루를 설명하는 단어들이다. 우리는 '적당한 시기에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으로 자신의 정상성을 증명'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에, 거기서 벗어난 비혼자, 동성애자, 다문화 가족, 미혼모와 미혼부 등은 자연히 정상 밖으로 밀려나게 마련이다. 이 책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선을 긋는 사람들에게 '세계의 가장자리를 살아가는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다른 것을 배척하지 않고, 낯선 것을 포용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 어떤 소중하고 아름다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마음'으로 인해 세상이 조금은 더 넓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해마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 사실이 즐거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언젠가 할머니가 되는 날을 조금은 설레며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기왕이면 재미있고 신기하고 이상하고 궁금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무루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나 역시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과 현명함을 동반한 귀여운 할머니가 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