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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바산장 살인사건 ㅣ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3부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평점 :
“아까 그 부인은 아무것도 없어서 온다고 했지만 사실은 반대가 아닐까?”
“반대?”
나오코는 몸을 일으켰다.
“무슨 소리야?”
“잘은 모르겠지만…….”
마코토는 예리한 눈빛으로 나오코를 봤다.
“여기에 모두 모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p.62
나오코는 친구 마코토와 함께 하쿠바에 있는 '머더구스 펜션'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곳은 1년 전에 나오코의 오빠 고이치가 자살한 곳이었다. 당시 나오코가 전해 듣기로는 오빠가 산속에 있는 어떤 펜션에서 음독 자살을 했다고, 침대에 쓰러져 있던 그의 머리맡에서 독약이 발견되었고, 방은 잠겨 있어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던 상태였다고 한다. 게다가 대학원 시험에 떨어지고, 취직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노이로제 상태였다는 것을 자살 동기로 보고, 별다른 타살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경찰은 '우울증에 의한 자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상한 것은 오빠가 죽기 전, 여동생 나오코에게 보낸 엽서에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는 거다. 나오코는 오빠가 어떤 곳에서 어떤 상태로 죽었는지,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문제의 펜션을 찾기로 결심한다.
매년 비슷한 시기에 같은 사람들이 대부분의 방을 예약하기에, 작년에 묵었던 손님들이 다 모이는 시기에 나오코와 마코토는 펜션으로 향한다. 여덟 개의 방에는 모두 신문 한 면 크기 정도의 벽걸이가 걸려 있었고, 거기에는 영국동요인 <머더구스>의 기괴한 노랫말들이 시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년에만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지난해에도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숙소 뒤쪽에 깊은 계곡이 있는데, 거기 걸려 있는 낡은 돌다리에서 떨어졌다는데 유서가 없어 자살도 아니고, 범인을 짐작할 수 없어 타살도 아니라 사고사로 대충 정리가 되었다고 한다. 산장에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한 나오코와 마코토는 오빠의 행적을 추적하던 중, 또 하나의 기이한 죽음과 맞닥뜨리게 된다. 매년 같은 곳에서 같은 사람들이 모이면 일어나는 사건은 정말로 우연인 걸까.
“2년 전에도 여기서 사람이 죽었습니다.”
마코토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무라마사는 잠깐 숨을 멈추고, 한참 뒤에 “예” 하고 대답했다. 그 호흡이 나오코의 마음에 걸렸다.
“3년 연속 사람이 죽었어요. 게다가 똑같은 시기에.”
“우연이라면 무서운 일이죠.”
“아니요.”
마코토가 형사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우연이 아닌 경우가 무서운 일입니다.” p.188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1985년 데뷔 이후 이듬해 발표한 초기작이다. 국내에는 <백마산장 살인사건>이라는 제목으로 2008년에 소개되었었고, 이번에 새로운 표지와 제목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밀실 트릭, 연쇄살인, 영국동요 <머더구스>에 얽힌 암호 등 본격 추리소설과 고전 추리소설의 여러 요소들이 잘 어우러져 지금 읽어도 여전히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작품의 주요 소재인 '머더 구스'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기보다는 쓰일 당시 사회의 상황이나 부조리를 부정적이며 잔인하게 묘사한 것이 많아서, 엘러리 퀸, 애거서 크리스티, 반 다인을 비롯해 추리 소설의 소재로 자주 사용되곤 했다. 운율을 우선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내용과 등장인물이 간혹 엉뚱하거나 기괴한데, 아이들은 가사에 개의치 않고 리듬을 따라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성인들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품 속에서 잔혹한 동요 <머더구스>의 가사들을 영어 원문과 번역된 문구로 많이 수록하고 있어 가사를 일종의 암호로 해석하는 독특한 미스터리 속으로 빠져 들도록 한다.
개별적으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듯 한 동요들이 어떤 규칙에 의해 재조합되며 서서히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는 것이 상당히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극중 탐정 역할을 맡은 여대생 콤비, 나오코와 마코토의 활약도 인상적이다. 나오코는 예쁜 외모에 가냘픈 이미지인데 반해, 마코토는 큰 체격에 옷차림과 말투가 남자 같아서 늘 남자로 오해 받곤 한다. 완전히 대조적인 분위기의 두 사람이 각각 역할을 분담해 사건을 풀어가는 재미 역시 이 작품 만의 매력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신인 시절에 썼던 작품이지만, 그의 최근 작품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선사하는 정통 추리소설의 정수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