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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도키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9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0년 4월
평점 :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정말로 먼 친척 맞아? 거짓말이지?"
다쿠미의 말에 도키오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표정에 평소의 부드러움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똑바로 다쿠미를 바라보았다.
"맞아. 친척 같은 거 아냐."
"역시 그랬군. 그렇다면 너는 대체....."
"나는........" 도키오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미야모토 다쿠미씨, 당신 아들이야. 미래에서 왔어." p.322
다쿠미와 아내 레이코는 여러 대의 생명유지장치에 둘러 싸인 채 투명한 벽 안쪽에 누워 있는 아들을 보고 있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만약 돌아온다 해도 아마 그게 마지막일 거라는 의사의 담담한 말투에 미야모토 부부는 너무나 슬펐지만 충격은 없었다. 왜냐하면 오래 전 다쿠미가 레이코에게 청혼을 할 때부터, 이는 어느 정도 예정된 수순이었기 때문이다. 레이코의 가족들은 희귀병 발병유전자를 가지고 있었고, 뇌신경이 차례차례 죽어버리는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은 치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병이 유전될 확률은 50퍼센트였고, 그들은 어떤 결과가 나와도 후회하지 않고 태어날 아이를 사랑하고 행복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심했었다. 아들 도키오는 십대 중반까지는 아무런 징후 없이 정상적으로 살았지만, 그 시기를 경계로 운동신경을 서서히 잃고 결국 식물인간 상태가 되고 말았다.
사실 희귀병 때문에 레이코가 결혼을 망설이던 순간에도,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고 어쩔 수 없이 지워야 하나 고민할 때도 다쿠미에겐 그녀를 설득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바로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라고 했던 어떤 청년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도키오의 마지막이 가까워지는 순간에 다쿠미는 레이코에게 고백한다. 옛날에 도키오를 만난 적이 있다고. 그때 자신은 스물세 살이었다고. 도키오는 시간을 거슬러 자신을 만나러 왔었다고. 그러니까 지금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도키오는 곧 스물세 살의 자신을 만나러 과거로 갈 거라고. 이게 다 무슨 소리일까. 아들의 죽음을 앞두고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걸까. 그렇게 이야기는 이십 년도 더 된 과거로 돌아간다.
"좋아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고 확신할 수 있으면, 죽음 직전까지도 꿈을 꿀 수 있다는 말이라고. 당신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미래였어. 인간은 어떤 때라도 미래를 느낄 수 있어. 아무리 짧은 인생이어도, 설령 한순간이라 해도 살아 있다는 실감만 있으면 미래는 있어. 잘 들어.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 그건 마음속에 있어. 그것만 있으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어. 그걸 알았기에 당신 어머니는 당신을 낳은 거야. 그런데 당신은 뭐야. 불평만 하고, 스스로 무엇 하나 쟁취하려 하지도 않아. 당신이 미래를 느끼지 못하는 건 누구의 탓도 아냐. 당신 탓이야. 당신이 바보라서." p.396
스물 셋의 다쿠미는 끈적끈적한 인간관계 따윈 질색, 허세든 뭐든 좋으니 큰 거 한 방을 노리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게 고작인 청년이었다. 여자친구가 지인에게 부탁해 어렵게 구해 준 면접 자리에 가서도 홧김에 자리를 박차고 나올 정도로 대책 없는 그에게 나타난 알 수 없는 청년 도키오.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도키오로 인해 다쿠미의 일상이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사실 현재 시점에서 진행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분량은 굉장히 짧고, 이야기의 대부분은 젊은 시절의 아빠를 만나러 온 아들과의 과거의 시점으로 펼쳐진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품에 대해 작가가 되고 가장 즐겁게 써내려간 소설이라고, 주인공 다쿠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캐릭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잘난 것도 없고, 성실하지도, 뛰어나지도 않았던, 지극히 평범하거나 오히려 그보다 못해 보이는 인물이 점차 성장하게 되는 스토리라 작가의 애정만큼 독자 입장에서도 그에게 감정 이입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도키오>라는 제목으로 200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8년에 소개되었었다. 이번에 비채의 히가시노 게이고 컬렉션으로 새로운 옷을 입고 개정판이 나왔다. 한층 더 원문에 가까운 새 번역과 새로운 표지 디자인, 그리고 작가와의 면밀한 상의를 통한 새 제목 등 전면적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식물인간이 된 아들의 영혼이 과거로 날아가,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모든 매력이 한 권에 압축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타임슬립이라는 SF적인 설정으로 시작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여자 친구를 추적하는 스릴과 미스터리를 거쳐 스물 셋의 아버지와 열아홉 아들 부자간의 특별한 모험 여정이 안겨주는 휴먼 드라마의 감동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내 아이로 태어나 행복했느냐고 물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든 다음 부모에게 그 답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어떨까” 하는 발상이 소설의 출발점이라고 밝힌 바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누군가의 부모이고, 누군가의 자식이기에 이 작품을 읽으며 뭉클한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