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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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라도 곧 아이들은 어른이 될 것이고, 어른이 되면 집을 떠날 것이다. 그러면 남편과 나는, 우리가 함께 걸어다닌 그 모든 시간과 내 몸과 내 그림자와 달에 더해서, 우리가 소리지르지 않고 소리지를 수 없는 그 모든 것의 무게 아래 웅크리고 있는 서로를 보게 될 것이다. 진실은 위로가 되지 못하지만 이것은 아주 분명한 진실이다. 내가 그랬듯 밤마다 오래오래 달을 쳐다보면 옛날 만화가 맞는다는 사실을, 달은 사실 웃고 있는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달이 보고 웃는 대상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 외로운 인간은 너무 작고, 달이 우리를 조금이라도 알아차리기에 우리 삶은 너무 순식간이다.    p.26

 

이 작품은 로런 그로프가 <운명과 분노>이후 삼 년 만에 발표한 최신작으로, 총 11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소설집이다. 작가가 십이 년간 플로리다에 거주하며 쓴 이 작품들은 모두 플로리다를 직접, 간접적인 배경으로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플로리다에서 태어나고 자랐거나, 미국 북부의 다른 주에서 태어나 플로리다로 이주해왔거나, 때로는 플로리다를 벗어나 이국적인 곳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지만 정서적으로 그곳에 계속 매여 있다. 외딴섬에 방치된 어린 자매, 머리를 다친 채 어린 아들들과 숲 속에 남게 된 어머니, 노숙자가 된 대학생, 홀로 집에 남아 허리케인의 소용돌이를 겪어내는 여자 등..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연에 대한 공포와 함께 일상 속 관계에서 비롯된 불안으로 휘청거린다.

 

로런 그로프의 문장은 전작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굉장히 정확하고 통찰력 있다. 매 장면 표현이 세심하고, 인물들의 감정을 명징하게 보여주며, 단어들의 선택도 무척 아름답다 .많은 작가들이 판에 박힌 듯 풀어내는 일상적인 묘사를 어떻게 직조 하느냐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로런 그로프는 그의 재능을 페이지마다 쏟아낸다. 생각들을 직조해 그것을 완벽하게 보완하는 단어들로 쌓아 올리는 눈부신 재능이야말로 그녀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그래서 종종 문장들은 시처럼 읽히고, 인물들의 사고는 너무도 지적이고 우아하다. 비록 그것이 끝없는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끔찍한 재난을 그리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로런 그로프의 문장이 이 작품 속에서 플로리다의 기후와 자연환경을 디테일하고, 섬세하게 묘사해내고 있어 이러한 배경은 등장인물들이 가지게 되는 감정과 심리 상태에 완벽하게 부합해 놀라운 서사를 만들어 낸다. 분명 아름다운 것들만 묘사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내게는 그 문장들이 아름답고도 우아하게 느껴졌다.

 

 

이곳 하늘은 거대하고 별이 많았다. 황홀해, 미나가 그들을 향해 걸어가며 생각했다. 공기는 차가웠고, 나무에서 체리 향기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부엌에서는 송아지고기와 꽃상추가 요리되고 있었고, 수영장은 저만의 달을 품고 있었다. 돌로 지은 집, 포도 덩굴, 벨벳 같은 눈을 가진 프랑스인들로 가득한 나라. 식탁에 둘러앉은 저 성난 얼굴들 위로 일렁이는 촛불의 불빛마저 로맨틱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어떤 것도 가능했다. 세상 전체가 쪼갠 복숭아처럼 활짝 벌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 불쌍한 사람들, 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 그들은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걸 보지 못하는 걸까? 그저 손을 뻗고 그것을 따서 입술로 가져가기만 하면, 그들도 그것을 맛보게 될 텐데.     p.163

 

'현란한 식물군과 동물군에 황홀해'하게 되는 자연 풍경과 '뜨거운 물에 느리게 익사하는 기분'이 드는 여름 날씨, 그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폭풍우와 허리케인의 소용돌이를 체험하면서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플로리다라는 장소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라쿤과 아르마딜로와 앨리게이터가 공존하는 풍경 속에서 폭풍우를 견디고 하늘 위의 달을 올려다 보며 시공간에 홀로 선 듯한 외로움을 느끼는 인물들의 모습에 서서히 동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외롭고 불안한 존재인 우리에게 유일하게 위안을 주는 것이 다름 아닌 '이야기'라는 점에 너무도 안도가 되었다. 극중 인물들은 끊임없이 상대에게 이야기를 하고, 틈이 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삶의 어떤 부분을 견뎌내고 있었다.

 

우리가 어떤 책을 읽었다고 해서,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강렬한 교감의 순간을 선사하는 문장들은 영원히 기억에 남게 마련이다. 바로 이 작품 속의 이런 문장들처럼 말이다. '그는 마음속에 다른 누군가를 결코 등호 같은 뭔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순수하고 완전한 뭔가로.', '내 아이들, 인류 문화가 길러지고 있는 두 배양 접시가 무한히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엄마가 된다는 것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빤히 쳐다보는 눈은 대체로 중년의 시기에, 길고 느린 실망의 순간들이 이어진 뒤에 생긴다','이제 그녀는 알고 그들은 모르는 그것이 그녀를 은밀한 삶의 기쁨으로 가득 채웠다. 내면의 헬륨 같은 것','죽은 자는 우리에게서 가져갈 것이 없다. 산 자가 가져가고 또 가져간다','단어들은 삶에서 깎아낸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이었다','책을 읽으면서 차츰, 그녀는 한 언어가 요구하는 것이 사람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등등.. 다 옮겨 적을 수 없을 만큼의 근사한 문장들이 가득하다. 한 문단, 한 문구, 흔한 단어 하나로도 삶이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을 테고 말이다. 이 책은 당신을 바로 그런 순간들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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