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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평점 :
"하지만 이 말은 해두는 게 좋겠군요."
여자가 반쯤 열려 있는 창문을 오른쪽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전 당신을 죽이려고 했어요."
역시, '카푸치노 한 잔이요' 라고 주문할 때 쓰는 말투였다. 뭐라고 대답할 사이도 없이 여자는 차 뒤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이드미러를 보자 여자는 이미 골목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죽음이란 단어만은 잔상에 남았다. 죽음이라....... p.38~39
이 작품의 주인공인 택배 기사는 사람들에게 '행운동'이라고 부린다. 우리는 그의 이름은 물론 어떤 이유로 고향을 떠나왔는지, 과거에 무슨 일을 하다 지금은 집도 없는 신세로 택배 회사의 컨테이너에서 지내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그저 그가 배달을 맡은 택배 관할 지역이 행운동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불리고 있을 뿐이다. 그는 매일 녹초가 될 때까지 일을 하고, 쉬는 날이면 술을 마시고 책을 읽으며, 누구와도 친분을 만들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록 동료들과 별다른 말을 섞지 않은 것은 성격 탓도 있었지만, 인간관계라면 이미 끊어진 과거의 것으로도 충분하니 다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수 적고, 무뚝뚝한 그의 단단한 틈을 억지로 비집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함께 근무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택배 일을 하다가 만나게 되는 행운동 사람들 모두가 그를 가만두지 않는 것이다. 담배 한 개비를 달라는 우울증 환자, 경찰복을 입고 그를 따라다니며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동네 바보, 그에게 경제철학 강의를 해주겠다며 집으로 부르는 노교수, 서비스로 술을 주겠다는 게이바 직원, 흰색 마스크를 쓰고 폐지를 줍는 젊은 여자 등등 각자의 과거와 각자의 비밀을 간직한 그들은 이상하게도 그에게 말을 걸고, 그에게 뭔가 부탁을 하고, 그의 삶에 간섭을 하려 한다. 평범한 삶을 갈구하는 행운동은 그들의 요구가 귀찮고, 그들의 사정에 관심도 없으면서 그들을 마냥 거절하지 못해 항상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것도 전혀 친절하지 않은 방식으로, 하나도 관심 없다는 듯이 시니컬 하고, 무뚝뚝하게 말이다.
"사회는 집념, 포기하지 않는 노력, 뭐 그런 걸 강요하지만 글쎄요, 제 생각엔 희망이란 게 사람에게 힘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괴롭히기만 할 뿐인 것 같아요. 그럴땐 포기하면 편하죠. 정말 그래야 할 일은 살면서 한두 가지 정도인 것 같아요. 대개의 일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가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이라는 뜻이니까."
"보통은 좀 더 노력해보라고 하는데 기사님은 다르게 말씀하시네요."
"나태하고 게으른 인간이라서 그렇겠죠." p.189
평범한 택배기사처럼 보이고 싶은 주인공 행운동은 아무리 봐도 전혀 평범하지 않은 택배기사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택배기사'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그런 이미지는 아니라는 거다. 물론 몸을 쓰는 택배기사라고 해서 가방끈이 길지 말라는 법은 없고, 그 피곤한 와중에 틈만 나면 책을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보통 몸을 사용해서 하는 일인 경우 잡생각 없이 그저 바쁘게 움직이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행운동 역시 평일 평균 150개의 물량을 배송하는 데 8시간 정도 소요되었고, 그러자면 3분에 한 개꼴로 배송을 해야 했으니 담배를 피울 시간도, 점심은 물론이고 잠시 쉬는 것조차 두려워서 못한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바쁜 택배 일을 제대로 해내면서도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그러면서도 개인적인 친분은 전혀 만들지 않고, 지쳐 쓰러질 정도에서도 숙소에 오면 책을 펼쳐든다. 이상하기 그지 없는 인물인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야기를 읽는 내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리고 누군가와 대화하는 중간에도, 혼자 생각하면서도 끊임없이 책 속 문장이나 작가의 말, 영화나 미드에 대한 것들을 인용한다. 오죽하면 극중 그와 대화를 나누던 여성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리고 그 말을 인용하면 자신이 근사해 보이나요?'라고 말할 정도로 말이다.
사실 <침입자들>이라는 제목도 그렇고 '한국형 하드보일드 소설'이라는 문구도 그렇고, 이 작품이 스릴러나 미스터리 장르라고 생각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지만, 가독성이 좋은 작품이라 단시간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오마주라 칭하는 그 수많은 인용문구들이 없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말이다. 문장과 대사에 인용이 너무 많은 소설이라 낯설게 느껴졌을 수도 있고, 가끔은 이야기의 흐름과 크게 상관없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지나치게 많은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아마도 소설 장르에서 등장인물이 이렇게나 많은 인용을 사용한 경우는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캐릭터들이었고, 현실에 굳게 발 딛고 서 있는 이야기라 통쾌하고, 시원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소설로서의 '재미'도 충분해서 누구라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