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빵과 진저브레드 -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
김지현 지음, 최연호 감수 / 비채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이디>에는 알프스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더불어 그곳의 자연에서 나는 음식이 많이 나온다. 막 짜낸 신선한 염소젖, 불에 구운 황금빛 치즈. 그야말로 천연 유기농 유제품들의 향연이다. 무뚝둑하지만 인자한 할아버지가 아낌없이 마련해주는 염소젖과 치즈를 하이디는 실컷 먹고 또 먹는다. 대접에 담긴 염소젖을 꿀껄꿀꺽 소리 나게 들이마시고, 버터처럼 부드러운 치즈를 빵에 발라서 한 입 가득 베어 물고.... 그 장면들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그려지는지 웬만한 '먹방' 뺨친다. 작가가 순전히 먹는 장면을 쓰고 싶어서 이 소설을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p.19

 

진저브레드와 생강빵, 월귤과 블루베리, 라즈베리 코디얼과 산딸기 주스, 각각의 단어는 같은 종류의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번역가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도 있고, 의미는 같으나 어감이나 분위기가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주로 고전 작품들은 번역판이 다양하게 나오는 편인데, 이는 독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의미가 그만큼 많다는 뜻도 된다. 이 책은 언어로 만들어진 세상을 탐험하는 ‘번역’의 황홀함과 고단함을 이야기하는 산문집이다. 저자는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본 적 없는 풍경을 생생히 옮기는 번역자로서, 이야기의 집을 짓는 작가로서 책 속으로 떠나는 매혹적인 탐험, 상상 속의 음식들, 원어와 번역어 사이에서 빚어지는 달콤한 오해를 나누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어렸을 적 읽었던 세계 명작 소설이나 소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한 번도 맛본 적 없고 만져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그저 낯선 음식의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며 상상만 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글을 쓰고 번역을 하는 일을 하다 보니 그토록 신비롭게 들렸던 마법의 주문들 중 일부는 사실 잘못된 번역이었으며, 그 환상적인 뉘앙스는 번역가가 음식의 이름을 적절한 우리말로 옮기지 못해서 생긴 오해일 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이웃집에 살던 가난할 할머니에게 주고 싶어 안달했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하얀 빵, 소공녀 세라의 눈을 사로잡았던 건포도가 박힌 큼지막한 빵들, 애거사 크리스티의 <외로운 신>에 등장하는 빵 껍질에 윤기가 흐르고, 폭신폭신한 롤빵, 그리고 워더링 하이츠의 식탁에 차려진 바삭바삭한 거위 구이, 스칼렛 오하라가 파티 전에 먹은 짭쪼름한 그레이비 등.. 고전 명작 34편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어른이 된 나에게도 여전히 매혹적인 마법을 선사한다.

 

 

<안나 카레니나>에는 군침이 돌만큼 맛깔스러운 식사 묘사가 많은데, 그중 절반은 오블론스키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특히 초반에 모스크바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오블론스키와 레빈이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오블론스키는 시골에서 올라온 오랜 친구 레빈을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으로 데려가서 하얀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 앞 벨벳 의자에 앉아 굴, 야채 수프, 진한 소스를 끼얹은 가자미, 로스트비프, 사철쑥을 곁들인 닭 요리, 과일 샐러드, 와인과 치즈를 주문한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굴이다.    p.172

 

어린 시절 아파트 입구에 있던 조그만 빵집에서 솔솔 풍겨오는 빵 굽는 냄새에 이끌려 가지고 있던 용돈을 털어 빵을 하나 사온 적이 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내게 빵이란 동화책 속에서나 등장하는 딱딱한 바게트 같은 이미지였는데, 그날 이후로는 갓 구운 빵 하나만 들고 있으면, 밀린 숙제도, 마음에 들지 않는 성적표도, 친구와의 다툼도 다 잊어 버리고 행복해졌던 기억이 난다. 퍽퍽하지만 담백한 스콘은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고, 진한 초코 향의 브라우니는 우울했던 기분마저 사라지게 만들어주었고, 특유의 향에 매혹되었던 시나몬 롤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었고, 우유랑 함께 먹으면 너무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카스텔라는 친구랑 함께 먹으면 든든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특별한 시기를 상징하는 음식은 시간이라는 틀을 거쳐 추억으로 박제가 되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먹는 사람의 영혼마저 감싸주는 소울 푸드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학 작품 속에서 만나는 음식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읽는 편이다. 음식이란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고, 작품의 배경을 그려주기도 하고, 등장 인물의 성격을 의미하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 플롯 전개에 중요한 매개체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사랑스러운 일러스트와 따뜻한 색감으로 읽기도 전부터 아기자기하고 따스한 느낌을 자아내는 이 책은 구성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식전 요리인 빵과 수프, 메인 디시인 주요리, 그리고 디저트와 그 밖의 음식들로 카테고리를 나누어 각각의 맞는 작품들과 음식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각 챕터 끝에는 최연호 파티시에의 감수를 받아 음식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정보를 덧붙였고, 윤미원 푸드 일러스트레이터의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들이 사랑스럽게 곳곳에 수록되어 있어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눈을 즐겁게 만들어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