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나의 자서전 - 김혜진 소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4
김혜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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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 부모는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수없이 다짐하고 어렵게 감행했던 일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들. 사람들의 미움과 분노를 불러오는 일들. 그런 일들이라는 게 늘 뭔가를 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항복하듯 두 손을 들고 침묵하는 편에 서게 되는 이유가 있다고 말입니다. 젊은 날의 결기나 기개 같은 것들은 스러지기 마련이고 나 역시 예외가 아닐 거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당신들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 건지도 모릅니다.    p.42

 

홍이는 남일동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재개발 계획도 거듭 무산되고,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달동네였다. 그녀가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가족들은 남일동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남일동이 반으로 쪼개어져 그들 가족이 살던 곳이 부촌인 중앙동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부모님은 남일동에 살았던 시절을 완전히 잊은 사람처럼, 처음부터 중앙동에서만 살아온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홍이를 남토(남일동 토박이)라 부르며 은근한 멸시의 눈총을 보낸다. 졸업 후 여행사에 취직한 그녀는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동료를 변호하다 같은 신세가 되어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서른이 넘도록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아무 계획도 없이 하루하루를 소진하던 어느 날, 남일동으로 이사 온 주해와 딸 수아를 만나게 된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에 처박히듯 방치되었던 동네, 다들 사라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동네였던 남일동이 주해 덕분에 조금씩 활기차게 변화하게 된다.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주해 덕분에 도서관이 세워지고, 어두운 집 앞 골목에 가로등이 설치되고, 한참을 걸어야 했던 거리에 마을 버스 노선이 들어오고, 약국 앞에 벼룩시장이 열러 1년 남짓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힘들게 입학한 중앙동 초등학교에서 수아는 친구들에게 남민(남일동에 사는 난민)이라 불리며 차별을 받고, 간호사였던 주해의 부정한 과거가 밝혀지고 그로 인해 열심히 일했던 재개발추진위원회에서 쫓겨나고, 결국 모녀는 남일동을 떠나게 된다.

 

 

그 밤, 우리 집을 올려다보던 어머니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왜 들어갈 생각은 않고 하염없이 집을 바라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걸까요. 오랜 시간이 더 지난 후에야 나는 그 밤 어머니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도무지 손안에 쥐어지지 않고, 어떻게 해도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 그 집을, 그럼에도 결코 포기가 되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어머니는 두려운 마음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p.122~123

 

집단 따돌림, 한 부모 가정, 허상과 과욕에 물든 사람들의 편견과 각자의 어긋난 욕망들은 낯선 듯하면서도 익숙한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주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나서 보여준 건 남일동에 살던 사람들이 내내 설마 설마 했고, 망설이다가 오래 전에 포기해버린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곳이 달라질 거라는 믿음, 바꿀 수 있다는 자신, 말이다. 덕분에 바뀐 남일동의 모습은 그 동안 누구도 항상 해본 적이 없는, 정말이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주해 모녀가 떠나고 마법은 그냥 사라져 버린다. 세상의 이중 잣대에 경종을 울리며 불합리한 사회를 헤쳐나가길 원했던 주해의 꿈이란 남일동 전체가 허물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일까.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스물네 번째 작품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특별한 시선으로 작품을 그려왔던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재개발, 빈부 격차, 지역사회 갈등, 그리고 '집'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과 욕망을 깊이 있게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경험해봤을 법한 풍경들이라 서글픈 공감과 안타까운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일 것이다. 극중 '나'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남일동에 살면서 매 순간 느꼈던 그 조마조마한 마음이란 대부분의 서민들이 겪어 왔던 그것일 것이다. '저절로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고, 끝없이 누군가에게 옮아가고 번지며, 마침내 세대를 건너 대물림 되고 또 대물림'되는 그것이 주류에서 소외된 이들의 절박함과 욕망으로 이어지는 것일 테고 말이다. '어떤 삶은 조금씩 나아지고, 또 다른 삶은 내리막길을 걷고, 느닷없이 중단되는 삶이 있고, 어느 날은 흐리고 어두워서 앞이 보이지 않다가 또 어느 순간엔 무서울 정도로 환한 날이 계속되고, 그런 종잡을 수 없는 많은 순간들을 응축해놓은 것이 삶'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 애잔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가득 담겨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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