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봉우리
유메마쿠라 바쿠 지음, 이기웅 옮김, 김동수 감수 / 리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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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미터를 넘으면 한 걸음 내딛고서 1분 가까이 숨을 헐떡이고 다시 한 걸음 내딛는, 그런 반복이 무한히 연속된다. 인간이 순응할 수 있는 고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6,000미터 부근으로 알려져 있다. 즉 아무리 고도에 잘 순응했다 하더라도, 그 고도를 넘어서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잠만 자더라도 점점 체력을 소모하게 된다. 6,000미터를 넘는 고도에서 오랫동안 체재하면 대량의 뇌세포가 죽는다. 히말라야 등반이란 생물에게 있어 극한상황을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p.466~467

 

후카마치 마코토는 일본에서 에베레스트를 함락하기 위해 찾아온 원정대 소속의 카메라맨이다. 원정대는 희생자를 둘이나 내고도 등반에 실패했고, 멤버들은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고 그는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를 정처 없이 걷는 중이었다. 대학을 막 졸업한 스물한 살 때 처음 와보고, 살, 서른다섯 살을 거쳐 마흔이 된 지금 네 번째 방문하는 거였다. 그는 우연히 한 등산용품점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곳에서 렌즈에 금이 가 있는 낡은 카메라 한 대를 발견하게 된다. 묘하게도 신경이 쓰이는 카메라였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기분 마저 들었다. 설마.. 했던 그 카메라는 맬러리가 1924년 등반에서 촬영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코닥 카메라였다. 만약 그 카메라에 있던 필름을 구해서 확인할 수만 있다면 히말라야 등반사가 뿌리째 뒤바뀌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대영제국이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최고봉을 밟기 위해 원정대를 보낸 건 1921년이었다. 원정대는 첫 등정 시도에서 8,225미터 고도까지 이르렀고, 다음에는 8,326미터까지 올랐다. 인류가 최초로 체험하는 고도였지만, 이들 모두 정상을 밟는 데는 실패했다. 원정대가 세 번째로 도전한 것은 1924년이었는데, 맬러리와 어빈이 정상 공략에 나섰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이후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게 된 건 29년이 지난 1953년이었다. 그런데 만약 맬러리와 어빈이 먼저 정상에 도달했던 거라면 어떨까.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은 거의 정상 직하라 해도 좋을 장소였고, 그들이 어떤 사고를 만나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고가 등정 전인지, 등정 후인지 그 누구도 알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맬러리가 정상에 섰다면 반드시 카메라로 촬영을 했을 것이고, 이는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다. 멜러리의 시체에 매달린 배낭 속에 카메라와 필름이 발견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전 세계 산악계를 뒤흔들 최대의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바로 그 카메라에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카마치는 그 비밀을 좇으면서 한때 일본 산악계의 전설로 불리던 하부 조지를 만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전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장소에서도 눈사태가 일어난다. 경사면에 눈이 쌓이면 아무리 완만한 경사면이라 할지라도 눈사태는 일어나기 마련이라며 우리들에게 가르치려는 자가 있다... 아주 잠깐 순간적으로 인간은 방심한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미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어쩔 수 없다. 인간으로서는 선택할 여지가 없다. 누가 그 순간이 어느 때라고 선택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그 순간은 신이 선택한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p.701

 

일본에서 720만 부가 판매된 ‘음양사’ 시리즈의 작가 유메마쿠라 바쿠가 구상부터 집필까지 20년의 시간을 들여 완성해낸 산악 소설의 전설적인 걸작이다. 영화와 만화로도 만들어졌었고, 국내에서는 2010년에 출간된 적이 있다. 400자 원고지 1,700매라는 압도적인 분량은 이번 개정판 버전으로 페이지수가 824페이지에 달한다. 묵직한 책의 무게만큼이나 작가가 오랜 시간을 걸려 쓴 세월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 그만큼의 깊이가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유메마쿠라 바쿠는 이 작품을 구상하던 시기에 등반 역사상 최대의 미스터리라 불리는 맬러리의 실종과 조난 사건에 대해 알게 된다. 심지어 맬러리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을 가능성도 있었고, 그걸 알아낼 방법도 남겨져 있었다고 한다. 숨겨진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맬러리의 시체와 함께 존재할 카메라 속 필름을 꺼내서 현상하면 된다, 에서 이 소설의 아이디어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에베레스트 8,000미터 이상의 장소에 존재해야 할 카메라가, 카트만두 거리에서 팔리고 있었고, 그 카메라를 소유하게 된 사람이 일본인이라면.. 으로 이야기가 발전된다. 하지만 당시 20대 중반의 그는 히말라야에서의 경험이 한 번밖에 없었기 때문에, 최소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는 직접 다녀오고 나서 쓰고 싶었다. 결국 여섯 번째 히말라야를 다녀오고 나서야 소설 집필이 시작되었다. 

 

그가 오랜 시간을 들여 수차례의 취재를 통해 만들어낸 표고 8,000미터 고공에 대한 묘사는 매우 디테일하고도 압도적 스케일로 펼쳐진다. 산에 모든 것을 내던진 인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산에 관심이 없는, 산악 소설을 처음 만난 독자들이라도 누구나 매혹 당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새롭게 출간된 개정판에서는 등반기술과 이론에 기반한 한국 전문 산악인의 감수를 거쳐 리얼리즘에 만전을 기했다고 하니, 번역의 디테일과 정확도 면에서도 완벽할 것이다. 유메마쿠라 바쿠는 작가 후기에서 '이 이야기에 변화구는 없다. 직구, 온 힘을 다 쏟아 부은 스트레이트.'라고 말했다. 구석구석 온 힘을 다 기울였고, 정면에서 맞서 싸우듯이 전력을 다해, 전부 토해냈기 때문에 이제 다 쓰고 몸 안에 남아 있는 건 없다고 말이다. 작가가 이런 마음 가짐으로, 이런 생각으로 토해낸 작품이라니 독자 입장에서도 그만큼의 각오를 다지고 책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산악 소설'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미스터리와 드라마로서 매우 빼어난 구조와 묵직한 이야기의 힘이 두툼한 페이지를 넘기는 데 주저함이 없게 만든다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재미와 감동을 모두 갖추고 있는 데다, 산악 소설이라는 쉽게 만나보기 어려운 장르가 가지고 있는 매혹, 그리고 전설적인 걸작이 마침내 복간되었다는 점에 있어서도 이 작품을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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