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세상의 봄 상.하 세트 - 전2권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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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절실한 목적이나 필요가 있으면 어떤 식으로나 바뀔 수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로. 어른이 아이로.
"사령의 빙의 따위는 그와 관계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원래 한 사람에게 하나 있는 마음이 여러 개 있는 것처럼, 한 사람 안에 다른 사람이 몇 명 있는 것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불과합니다."      -상권, p.252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처음 만났던 것이 2005년에 국내 출간되었던 <이유>였으니, 벌써 15년이나 지났다. 오랜 시간에 걸쳐 전작을 찾아 읽었던 작가라 그런지, 이번 작품은 더욱 의미가 있다. 이번 신작은 미야베 미유키가 등단 30주년을 맞는 해에 발표한 81번째 작품으로 9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대작이다. 시대소설에서는 드문 정신 착란, 연쇄살인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어떻게든 살아내면 봄은 꼭 찾아온다는 의미를 담아 제목을 ‘세상의 봄’이라 붙였다고 한다. 에도시대 가상의 작은 번을 무대로, 정신착란을 이유로 연금된 청년 번주와 그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애틋한 충정과 사랑을 담고 있는 이 이야기는 발표 즉시 ‘소설사에 유례없는 작품’ ‘21세기 최강의 사이코&미스터리’라는 극찬을 받았다고 하니 더 기대가 되었다.

 

 

다키는 열일곱 살의 나이로 혼례를 올렸지만, 시어머니의 폭력과 괴롭힘으로 삼 년이 못 돼서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토목청 감독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은거소로 거처를 옮기고, 오빠가 아버지의 뒤를 잇고 아내를 맞이해 자식을 두었다. 누구에게나 환경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게 마련이었다. 원하는 방향으로나, 원치 않는 방향으로나,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간에 말이다. 그렇게 변덕스럽고 잔인한 운명은 다키 처럼 하찮은 한 여자에게도, 촉망 받던 청년 군주에게도 평등하게 찾아 들었다. 기타미 번 6대 번주 시게오키가 중병으로 인해 은거하게 되고, 7대 번주로 그의 사촌이 오르게 된 것이다. 게다가 시게오키의 병환이라는 것이 너무도 기이해서, 모두가 쉬쉬하는 가운데 그가 실성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간다.

 

 

다들 사람이 좋아서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준다. 기타미 번은 윤택하지는 않지만 영민의 마음은 윤택하고 따뜻하다. 그런 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며 번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고 말한다면. 비애와 노여움에 먹먹해진 가슴에 먹물을 떨어뜨린 것처럼 검은 불안이 번졌다. 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나는 정말로 올바른 일을 할 수 있을까. 사람은 보이지 않는 널따란 가을철 목장을 둘러보며 한주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권, p.162

 

호숫가에 절이나 신사처럼 엄숙하게 기와지붕을 이고 고요히 선 저택 고코인, 시게오키는 그곳 저택의 호화로운 병풍과 장식으로 치장된 방에 이중으로 잠겨있는 창살로 둘러싸여 요양 중이다. 꽃처럼 아름다운 외모의 청년 시게오키는 천진한 소년이었다가, 교태 부리는 여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흉포한 사내로 혼란과 착란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다키는 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 고코인에서 시게오키의 시중을 들게 된다. 다키가 그곳에 가게 된 이유는 그녀의 어머니가 미타마쿠리라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일족이었기 때문이다. 미타마쿠리는 인간의 영혼을 조종해 그것과 의사소통하는 기술로 현재는 거의 사용하는 이들이 없었다. 과연 다키는 자아를 잃어버리고 종종 다른 사람이 되고는 정신이 들면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시게오키의 증상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코인의 저택 관리인과 주치의, 하인 등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과 함께 다키는 시게오키를 가두고 있는 어둠의 심연에 조금씩 다가간다.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악의는  소년 연쇄 실종사건, 쿠리야 일족 몰살사건 등으로 이어지며 두툼한 페이지만큼이나 밀도 있는 서사를 만들어 낸다.

 

 

미야베 미유키의 기존 작품들에 비해서는 가독성이 높은 이야기는 아니라서, 초반에 진도가 잘 안 나가는 편이긴 했다. 시대물임에도 불구하고 연쇄 살인과 정신 착란 등의 현대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있어서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워낙 서사 자체가 느리게 진행되는 편이고, 과거와 배경 설명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고 있어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상권의 중반 정도까지만 잘 따라가면 어느새 캐릭터 각자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미스터리는 물론, 드라마로서도 흡입력 있는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었고, 제목과 표지 이미지에서 묻어나듯 해피 엔딩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라서 미야베 미유키 특유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상큼한 빛깔의 겉표지를 벗겨내면 만날 수 있는 속표지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해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결코 적지 않은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배경과 성격이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는 그녀가 어떤 주제를 다루더라도 인간 본질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 작가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극중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쉽고 납득하기 쉽다는 이유만으로 결론을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런 식으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게 아닙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가 이 작품을 긴 호흡으로,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뷔 30주년을 넘어 더 오랜 시간 동안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오랜 독자로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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