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순간들 - 박금산 소설집
박금산 지음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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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이 어떤 책에서 말했다.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길게 쓸 수밖에 없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너는 단편소설을 쓰고 싶었던 거잖아. 짧아져야 감동적인 거야. 너저분하게 늘어놓아서는 안 돼. 단편소설은 시를 쓰듯이. 알았냐?”
“요약을 해서 분량을 줄이라는 뜻입니까?”
“요약이 아니라 선택을 하라는 거야.”      -'소설을 잘 쓰려면' 중에서, p.57

 

굉장히 독특한 구성의 소설집이다. 일반적인 단편소설보다 훨씬 더 짧은 분량의 초단편소설은 플래시 픽션이나 엽편 소설이라 불린다. 1,000자 혹은 2,000자 내외의 아주 짧은 이야기로, 단 몇 페이지의 분량이라 읽는 데 몇 분도 채 걸리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바쁜 현대인들이 갈수록 책을 읽지 않는데다, 책을 좀 읽는 독자들도 5,000자 이상의 글은 잘 읽지 않는다고 해서 한때 초단편 소설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왔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나는 단편보다는 장편을 더 선호하는 편이라, 단편보다도 더 짧은 초단편 소설들은 굳이 찾아 읽진 않았다. 그래서 이 책에 수록된 플래시 픽션 스물다섯 편을 읽으면서 색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된 것 같다.

 

사실 소설들 그 자체보다도 이 소설집의 구성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야기의 단계에 따라 발단, 전개, 절정, 결말 총 4부로 나뉘어져 각각의 카테고리에 스물다섯 편의 이야기들을 수록했고, 각각의 장마다 발단에 대하여, 전개에 대하여, 절정에 대하여, 결말에 대하여, 라는 이름으로 소설론과 작법론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소설을 읽으면서도, 이게 소설집인지, 작법서인지 알 수가 없어진다. 그리고 바로 그런 독특한 점 때문에 이 책은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기도 하다.

 

 

'이봐, 당신 남편 어디 갔어?' 아내를 깨워 묻고 싶었다. 아내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다가 거두었다. 두려움에 손길이 가로막혔다. 혹시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면..... 남편을 찾아야 한다. 그는 다용도실로 들어갔다. 남편은 옷걸이 뒤에 숨어 있을 것이다. 불을 켰다. 옷장 문을 열었다. 그곳에도 남편은 없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다' 중에서, p.148

 

이야기의 시작인 '발단'을 워밍업이라고 생각했다면, 작가는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9회 말 투 아웃 만루 상황에서 던지는 첫 공이 바로 소설의 발단이라는 얘기다. 가장 긴장되고, 극적인 순간이 '절정'이 아니라 '발단'이라니,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1회 초 1번 타자가 자석에 들어서는 것이 발단이 되어서는, 독자들 다 도망간다. 긴장된 상태에서 출발해야 하는 발단은 '소설의 시작이지만 이야기의 시작'은 아니라는 얘기다. 전개는 서핑에서 보드 위에 올라서는 과정과도 같다. 엎드려서 팔을 젓다가 파도의 힘을 이용해 두 발로 일어나는 것, 그래서 보드는 전진하고, 몸은 상승해야 하니 매우 어려운 과정이기도 하다. 절정은 소설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절정은 끝이지만 절벽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결말로 가는 길은 반드시 뚫려 있어야 한다. 승부가 절정이라면 환호가 결말이다. 절정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결말로 가는 길은 좁고 분명하기 때문에, 좋은 결말은 외길이다.

 

저자는 소설가이자 대학에서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 문예창작학과 교수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웬만한 작법책이나 이론서보다도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론에 대한 부분은 짧고 굵게 딱 포인트만 콕콕 집어서 알려주고, 그 뒤에 각각의 단계에 해당되는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으니 바로 이론을 실전에 적용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발단의 특징이 있는 소설들은 뒤에 이어질 내용을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고, 클라이맥스를 연상시키는 절정의 특징이 있는 소설들은 앞의 이야기들을 만들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는 초단편 소설들을 만날 수 있는 소설집으로 읽어도 흥미롭고, 소설의 형식과 작법에 관한 안내서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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