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지나간 후
상드린 콜레트 지음, 이세진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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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암과 파타가 열심히 노를 저으면 12일 만에도 도착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아버지로서 도저히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문제, 그의 입 속을 활활 태우는 문제. 그들에게 배는 달랑 한 척뿐이었다. 파타의 짐작대로 마디는 이미 그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지금 그를 쏘아보는 불같은 눈, 미움과 절망이 뒤섞인 저 눈, 그를 완전히 원망하는 눈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바다, 폭풍, 불운이 모두 그의 탓이라는 듯이, 순전히 그의 탓이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누구를 남길 건데?"     p.35

 

파도가 일어나고 6일이 지났다. 파도는 세상을 집어삼키고 집, 차, 가축, 사람, 모든 것을 한바탕 쓸고 갔다. 쓰나미가 밀려왔고, 미쳐 날뛰는 날씨와 거의 쉬지도 않고 퍼붓는 폭우에 시달린 끝에 루이의 가족들을 제외한 나머지 섬사람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다행히도 루이의 가족들은 높은 언덕 꼭대기에 있어서 화를 면한 것이다. 집은 무사했지만 이제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은빛의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구조대를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6일째 되는 날에도 해수면은 조금도 낮아지지 않았다. 먹을 것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바다의 수위는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떠나야했다. 물 밖으로 나와 있는 땅까지 이동하려면 배로 꼬박 12일은 걸릴 터였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배에는 가족 모두 탈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루이의 가족은 무려 열한 명이었다. 9남매 중에 형들 두 명 리암과 마테오는 열다섯, 열세 살이었고 루이를 포함한 중간 셋은 각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루이는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뒤틀린 채로 나와 절름발이였고, 그 아래로 페린은 어릴적 사고로 한쪽 눈이 없는 애꾸눈이었고, 노에는 마치 난쟁이처럼 몸집이 왜소하고 작았다. 그들 아래로 딸 넷은 겨우 여섯 살, 다섯 살, 세 살, 한 살로 아직 너무 어렸다. 맨 처음 태어난 형들은 체격이 건장하고 잘생겼고, 나중에 태어난 네 딸에게도 아무 결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루이는 중간 아이들만 왜 이 모양인지, 그들만 세 명의 실패작이 아닌지 생각한다. 자, 과연 누구를 남기고, 누구를 데려가야 할까. 엄마는 누구도 선택할 수 없었고, 아빠가 최대한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 리암과 마테오는 아빠와 함께 교대로 노를 저어야 하고, 어린 딸들은 아직 부모의 손길이 너무도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중간 세 명을 남기기로 한다. 엄마는 제일 성치 못한 애들을 남기자는 거냐고 하지만, 아빠는 그들은 매우 영특한 데가 있으니 어떻게든 버틸 거라고 말한다. 과연 남겨진 세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이들 가족은 무사히 육지에 도달해서, 남겨진 세 아이를 데리러 돌아올 수 있을까.

 

 

애들을 혼내서는 안 된다. 이제 사는 것처럼 사는 사람은 저 어린것들밖에 없다. 그가 다음의 일, 다음 끼니를 앞질러 고민할 때 과거를 잊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현재의 순간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 저 아이들이 백 번 천 번 옳다. 파타는 어린 딸들의 동물적인 자발성이, 계산이 깔리지 않은 생동감이 부러웠다. 그 아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생각지 않고 내일로 나아가니까. 선악을 모르는 백지 같은 영혼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딸들은 이기적이고 눈부셨다. 파타는 딸들을 눈 속에 품고 한두 시간쯤 선잠을 잤다. 딸들이 없었다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p.215

 

거대한 자연재해에서 살아남은 일가족 11명, 그러나 안전한 곳으로 탈출할 수 있는 인원은 제한되어 있다. 내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대단히 흥미로운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대단히 흡입력 있는 서사를 보여준다. 차세대 프랑스 누아르 소설가 중 가장 뛰어난 작가로 손꼽히는 상드린 콜레트의 작품으로 우화처럼 읽히기도, 심리 스릴러처럼 읽히기도 하는 대단히 매력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모가 힘겨운 선택을 하고 남겨진 세 명의 아이의 시점에서 먼저 이야기가 진행되고, 나머지 여섯 명의 아이들과 배를 타고 섬을 떠난 부모의 시점으로 이야기는 교차 진행된다. 남겨진 아이들은 생각한다. 왜 하필 우리 셋일까. 아빠 엄마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답을 알 수는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남겨진 그들끼리 부모가 돌아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한편,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섬을 떠난 부모의 상황 역시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바다는 점점 더 험악해졌고, 배 한 척도 과히 믿음직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생존, 그것도 자신의 그것이 아니라 어린 자녀들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로서의 고통과 슬픔이 고스란히 와 닿도록 하는 세심한 심리 묘사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그리고 무자비한 자연재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내몰린 인간으로서의 선택, 그 잔인한 딜레마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 라는 실존적 질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 서스펜스와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이야기 자체가 너무 재미있게 읽히고,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속도감과 차가우면서도 따뜻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재난 소설과 휴먼 드라마로서도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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