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방
오쓰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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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깨달았다. 아빠에게는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엄마에게는 아빠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나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는 아무도 없다고, 아빠와 엄마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는 아빠와 엄마 어느 한쪽이 죽은 거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아빠는 엄마가 죽어 나와 단둘이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반대로 엄마는 아빠가 죽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서로가 보이지 않고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각자에게 보이는 것은 나뿐이었다.     - 'SO-far'중에서, p.73

 

열 살인 나는 곧 고등학생이 되는 누나와 함께 창문도 없는 작은 사각형 방에 쓰러져 있다가 눈을 뜬다. 대체 어떻게 이 방에 오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엄마가 장을 다 볼 때까지 누나가 나를 돌보던 중이었고, 그들 남매는 산책로를 걷던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뒤쪽 수풀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고, 머리에 지독한 아픔과 함께 이 방에서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곳은 어디인지, 누가 그들을 가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차가운 회색 상자 같은 방에는 바닥의 중앙 부분을 관통해서 도랑이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 중에 체구가 작은 소년이 도랑 안을 지나서 방 바깥으로 나가보기로 한다. 그리고 도랑을 타고 다른 방을 넘나들며 이곳에 있는 방이 일곱 개라는 사실과 각 방에는 영문도 모르고 갇혀 있는 사람이 한 명씩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매일 저녁 6시, 도랑에 흐르는 물에 붉은 색깔이 비치며 끔찍한 것들이 떠내려온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과연 이들 남매는 이 방을 탈출할 수 있을까.

 

표제작인 <일곱 번째 방>은 마치 영화 '큐브'를 연상시키는 설정으로 초반부터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몰입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두 남매가 처한 상황에 대한 정확한 동기나 배경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극한의 공포를 선사하는 이 이야기는 놀라운 결말에 이르기까지 오싹한 공포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는 그 외에도 섬뜩할 정도의 상상력으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오츠이치의 천재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논란과 찬탄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마성의 천재 작가'라고 불리는 오츠이치 답게 본격 추리 미스터리에서 SF, 호러, 블랙코미디 등등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들을 자유자재로 선보이고 있는 소설집이라 오츠이치 종합 선물 세트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기도 하다.

 

 

헤드라이트 불빛 아래, 하얀 선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길 양 옆의 마른 풀이 빠른 속도로 뒤쪽을 향해 멀어져갔다. 조금만 있으면 간판이 나타난다. 늘 결심이 꺾이고야 마는 장소다. 나는 숨을 멈췄다. 차가 그 지점을 통과한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암흑 속에서 차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우주에서 정지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순간이었다.     -'ZOO' 중에서, p.120

 

유치원생인 나는 아빠랑 엄마랑 셋이서 살고 있었다. 그들 가족은 거실에 있는 소파에 자주 함께 앉아서 일상을 보내곤 했는데, 항상 내가 가운데 앉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엄마와 아빠는 서로가 없는 존재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셔서 우리 둘뿐이지만 열심히 살자고 했고, 아빠는 엄마 몫까지 꿋꿋하게 살자고 말했다. 나는 아빠에게는 엄마가 보이지 않고, 엄마에게는 아빠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아빠는 엄마가 죽어 나와 단둘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고, 반대로 엄마는 아빠가 죽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가 보이지 않고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각자에게 보이는 것은 나뿐이었고, 나는 아빠와 엄마 사이를 오가며 두 사람 각각과 생활을 해야 했다. 아빠가 살아 있는 세계와 엄마가 살아 있는 세계, 그리고 각각이 겹쳐진 곳에 존재하는 나, 대체 이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개인적으로 이 소설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SO-far>라는 작품이다. 분량이 그리 길지 않음에도 결말 이후에 여운을 남겨주는 이야기였고, 오싹한 감정과 먹먹한 슬픔,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주는 충격까지 인상적이었다.

 

이 소설집은 <일곱 번째 방>을 비롯해 <ZOO>, <카자리와 요코>, <SO-far>, <양지의 시> 등 5편의 단편이 옴니버스식 영화 <ZOO>로 개봉해 마니아들로부터 호평을 받기도 했다. 사실 이번에 출간된 이 작품이 오츠이치의 신간이라고 생각했던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 소설집은 국내에 2007년에 출간되었던 <ZOO>의 개정판이다. 표지 분위기가 바뀌었고, 수록된 작품 중에 표제작을 바꾸어서 제목이 달라졌을 뿐이다. 오래 전에 출간된 작품을 이렇게 새로운 옷으로 바꿔 입혀 재출간하게 되면 더 많은 독자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 언제나 반기지만, 요즘은 개정판이라는 표기를 전혀 하지 않아서 신간인줄 알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신간이라고 구매했는데, 읽다 보니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인 경우도 있을테고 말이다. 오츠이치의 작품은 국내에도 꽤 많이 출간된 편이다. 그의 작품은 크게 섬세함과 안타까움을 기조로 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퓨어 계열'의 화이트 오츠이치와 잔혹함과 처참함을 기조로 하는 '다크 계열'의 어두운 블랙 오츠이치로 나누기도 한다. 그만큼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보여주는 작가이고, 작품 스타일에 따라 필명을 바꾸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규칙이나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섬뜩할 정도의 상상력과 인간의 두려움, 뒤틀린 내면에 대한 묘사가 독특한 매력을 보여주는 이 소설집은 가장 오츠이치 다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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