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
매기 앤드루스.재니스 로마스 지음, 홍승원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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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이혼 절차 때문에 기혼 여성에게 재산을 소유하고 계약을 체결할 법적 지위가 없었던 시절인 18세기와 19세기 영국에서는 대중적으로 아내를 파는 관행이 생겨났다. 아내 판매는 공공장소에서 이뤄지기도 했고 때로는 신문이나 포스터로 광고되거나 마을 안내원이 소식을 전했다. 18세기의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은 공고를 냈다.
“제 아내 제인 허버드를 5실링에 팝니다. 체격이 건장하고 사지가 튼튼합니다. 씨를 뿌리고 수확하며 쟁기를 들고 팀을 꾸려 일합니다. 입이 걸걸하고 고집이 아주 세기 때문에 고삐를 바짝 죈 그 어느 건장한 남자에게도 말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p.93

 

영국 여성의 참정권 획득 100주년을 기념하여 쓰인 이 책은 여성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거나, 여성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오늘날까지도 여성을 억압하고 있는 물건들을 중심으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발달해온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여성의 역사를 오래도록 연구해 온 두 명의 영국 여성학자가 남다른 시선으로 세심하게 골라낸 여성 생존의 도구와 증거 100가지가 고스란히 '여성의 관점에서 다시 쓰는 세계사'가 된다는 점에 있어서 대단히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너무도 다양한 100가지 물건들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삶을 바꿔온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는 점이 놀랍고도 흥미롭게 읽힌다.

 

사회와 가족은 아내이자 가정주부인 여성에게 수많은 기대를 걸고, 엄청난 양의 충고와 질책, 비난을 해왔다. 목소리를 내면 굴레를 씌웠고, 술을 마신다고 규탄했다. 정말 경악할 만한 것 중의 하나로 '잔소리꾼 굴레'라는 물건이 있었다. 16세기 스코틀랜드, 메리언 레이는 이웃을 간통죄로 고발했다가 다수의 비방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녀는 '문제적인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고소인들의 용서를 구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24시간 동안 '일체의 휴식 없이' 입을 막는 굴레를 채우는 고문을 받아야 했다. 묵직한 쇠틀로 만들어진 이 장치는 피해자의 머리 위로 뒤집어 써 칼라처럼 목둘레에 걸치는 방식이었는데, 책에 수록된 사진만 보더라도 매우 충격적이다. 당시 가부장적인 기대치를 벗어나 불손하거나, 제멋대로 말하는 여성이나, 통상적인 여성의 관념에 도전하는 여성에게 잔소리꾼이라는 터무니없는 꼬리표가 붙었고, 이 장치는 바로 그 '잔소리'에 대한 처벌이었던 것이다. 이 굴레는 18세기까지도 계속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남아 있으므로, 여성들은 거의 200년 동안이나 잔소리꾼 굴레로 침묵을 강요당해 온 것이다. 이는 현대의 여성 혐오 표현들과도 이어지는 충격적인 역사의 잔존물이다.

 

 

이날 백인들의 좌석은 모두 차 있었다. 로자는 '유색인' 구역 맨 앞줄에 앉아있었는데 한 백인 남성이 버스에 올랐다. 버스기사는 백인 남성이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로자가 앉아있는 열에 있는 모든 흑인 승객들에게 뒤로 자리를 옮기라고 했다. 세 명의 흑인 승객이 버스기사의 지시에 따랐지만 로자는 거절했다. 그는 나중에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항상 내가 피곤해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신체적으로 지쳐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단지 굴복하는 것에 지쳐있을 뿐이었다."    p.430

 

18세기와 19세기, 기혼 여성에게 계약을 체결할 지위가 없던 시절 이혼의 수단이었던 아내 판매 광고에 대한 내용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물론 아내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계층에게는 아내 판매가 일종의 이혼으로 여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 이후부터는 여러 나라에서 이혼 절차가 한결 간편해졌고, 20세기 후반에는 좀 더 자유로운 이혼법이 도입되었으나 여전히 이혼에 따른 재산과 소득의 분할은 여성들에게 재정적인 불이익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도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100가지 물건들은 여성의 몸, 사회적 역할의 변화, 기술의 진보, 미의식과 소통, 노동과 문화, 정치 등 총 여덟 가지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여성사의 전말을 담아내고 있다. 여성이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대의를 주장했음을 알려주는 작품들, 불의와 억압에 대한 투지를 보여주는 상징들은 안타까우면서도 뭉클했고, 여성이 도움을 받거나 직접 그 발달에 기여한 기술들, 즐거움이었지만 억압의 대상이기도 했던 의생활의 아이템들은 그 속에 담겨 있는 서사 자체가 역사와 세계사를 관통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여성들은 너무나 자주 잊히는 현실 속에서도 통치자로서, 과학자로서, 창조적인 재주꾼들로서 자기 자신의 역사뿐 아니라 모두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이 책을 통해서 항상 '역사에서 가려져' 있었던 여성의 역사가 얼마나 매혹적일 수 있는지, 그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발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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