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아내
A.S.A. 해리슨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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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착실한 남자란 신화 속 인물이나 다름없어. 생물학적으로 남자들은 포식 동물이야."
"그 얘기 좀 더 해봐." 앨리슨이 재촉한다.
˝여자들은 자기 남자가 실제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하거든.˝ 조디가 덧붙인다. ˝남자들을 위해 대신 변명해주지. 큰 그림을 못 봐. 한 번에 조금씩만 볼 뿐. 그래서 남자들이 실제만큼 나빠 보이질 않는 거야.˝    p.122~123

 

심리상담사로 일하는 조디 브렛과 건축 사업을 하는 토드 길버트는 이십 년간 부부 생활을 이어 왔다. 하지만 토드는 습관적으로 외도를 해왔고, 그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그녀도 알며, 그녀가 안다는 사실을 그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부의 관계는 평온하고, 안정적인 상태였다. '사실이 공공연히 선언되지 않는 한, 토드가 완곡어법과 우회적 표현으로 말하는 한, 그들은 지금까지의 삶을 계속할 수 있었다. 토드는 결국 자기 자리로 돌아왔고, 조디는 언제나 용서했다. 참 이상하기 그지없는 부부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남편이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고 있지만 대놓고 비난하지 않는 아내와 끊임없이 다른 여자를 만나면서도 아내에게 그다지 불만도 없고, 그녀를 떠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남편, 대체 어떻게 이십 년 동안이나 부부로 살아온 건지 이해가 안 되지만 어쩌면 바로 그게 현실 부부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삶이 불완전하기는 해도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무한히 계속되리라 여기면서, 그저 평범한 일상사에 집중하며 순간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야기는 '그 여자', '그 남자'라는 챕터로 조디와 토드의 시각으로 교차 진행된다. 가정이 주는 안정감과 불륜이 주는 짜릿함이 모두 필요한 남자와 남편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든 현재의 평온한 삶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조디는 아들러 연구자로서 다양한 성향을 가진 내담자들과 오랜 시간 심리상담을 해왔다. 덕분에 그녀는 남편의 거짓말을 눈치챘고, 그의 사고방식까지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가정의 평안을 위해 침묵을 선택했던 그녀, 아름답고 헌신적인 아내는 어떻게 살인자로 돌변하게 되는 것일까. 대체 이들 부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십 년 동안이나 자신의 생활 방식이 안전하다 믿고 살았는데, 지금 알고 보니 그동안 줄곧 실 한 오라기에 매달려 있는 꼴이었다. 토드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래로 그녀는 망상에 빠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 밖에 다르게 생각할 길은 없다. 그녀는 거짓된 전제, 소망이 만들어낸 생각 위헤 자신의 삶을 쌓아왔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p.272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가끔 우리를 완벽하게 배신하곤 한다. 무려 이십 년 동안 함께 살았던 남편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하리라고 조디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름으로 인해 아내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걸 토드 역시 짐작도 못했을 테고 말이다. 분명 두 사람도 처음에는 설레이는 감정을 느꼈고, 서로 사랑했고, 함께 있으면서 안정감과 평온을 안겨주는 상대라고 생각했을 텐데 말이다. 토드는 조디가 자신에게 갖는 기대에 맞추어 살고 싶은 마음이었고,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고 싶어 했다. 조디는 그의 성공과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약속을 실천하고 꿈의 영역을 걸어가는 모습에 감탄했었다. 그녀에게 그는 사랑과 헌신이 아깝지 않은 너무도 소중한 존재였고, 그는 그녀를 한 남자가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자 그 이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랬던 마음이, 사랑이, 감정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왜 토드는 딸 같은 어린 여자를 임신시키고 조디를 떠나려고 했을까. 왜 조디는 그의 수많은 잘못을 용서해왔음에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걸까.

 

이 작품은 배신과 복수에 대한 서사보다 이들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 그 배경에 더 집중하고 있다. 아내와 남편 각자의 일상과 어린 시절, 대학시절 등 전반적인 삶에 대해 그리며 내면 속으로 점차 깊이 있게 파고든다. 이 작품은 캐나다 작가 A.S.A. 해리슨의 데뷔작이자 유고작으로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했던 작가가 '등장인물이 자기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 주변 환경에 대한 서술을 통해 인물의 감정적 변화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쓴 가정 스릴러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동안 만나왔던 가정 스릴러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서사를 이끌어 가고 있는데, '조용한 아내'라는 제목처럼 전반적으로 흐름이 잔잔하게 고여 있는 호수처럼 가만 가만하게 진행된다. 그럼에도 전혀 지루하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급격한 변화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단계적으로 몇 날 몇 주에 거쳐 점진적으로 일어나게 마련이니 말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 수면 밑에서 조용하게, 차곡차곡 쌓여온 감정들이 파도가 되어 페이지 바깥으로 밀려 오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고, 이 작품의 진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제대로 발휘된다. 니콜 키드먼 주연으로 영화화가 확정되었다고 하니, 스크린에서 펼쳐질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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