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관 살인사건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8
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강원주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론 구가 시즈코는 박식하기 짝이 없어. 하지만 그녀는 색인 같은 여자야. 모든 기억이 장기판 조각처럼 정확하게 배열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 그렇지, 그야말로 정확성은 비길 데가 없지 그래서 독창성이나 발전성과는 인연이 없는 거야. 첫째, 그렇게 문학에 감각이 없는 여자에게서 어떻게 비범한 범죄를 계획할 만한 공상력이 나오겠나?"
"도대체 문학이 이 살인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야?" 검사가 따졌다.    p.104

 

통칭 ‘흑사관’이라고 불리는 후리야기 성관에는 오래 전부터 언젠가 괴이한 공포가 생겨날 것이라는 풍문이 있었다. 후리야기 성관은 호화스럽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켈트 르네상스 양식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볼거리였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퇴색되어 거칠고 황폐해지더니 언제부터인가 저택 주위를 안개 같은 것이 둘러싸기 시작해 비밀스럽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성관에서 기괴한 죽음을 연상시키는 변사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동기 불명의 사건이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고, 연이어 성관의 주인인 산테쓰 박사마저 기괴한 방법으로 자살한다. 그리고 1년 뒤,  4중주단원 중 한 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 현악 4중주단을 이루었던 네 명의 외국인들은 어릴 때부터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성관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으며 감금된 채 길러졌다는 소문이 무성했었다. 이렇게 갖가지 억측이 낳은 환상으로 둘러싸인 그곳,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넣어둔 성관과 닮았다고 하여 ‘흑사관’이라 불리는 그곳으로 노리미즈 탐정과 하제쿠라 검사, 구마시로 수사 국장이 투입된다.

 

자. 살인사건이 벌어졌고, 명탐정이 등장해 수사를 하기 시작한다. 여느 추리소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구성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초반부터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 작품이다. 수사 진행은 매우 느리고, 탐정은 사건 해결보다 자신의 편집광적 지식 나열에 더 열을 올릴 뿐이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분명 단어 자체게 크게 어려움은 없는데도, 대체 내가 무슨 내용을 읽고 있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된다는 점이다.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노리미즈의 어마어마하게 광범위한 현학적 지식 나열이다. 그는 시종일관 신비주의, 점성술, 이단 신학, 종교학, 물리학, 의학, 약학, 문장학, 심리학, 범죄학, 암호학 등에 대한 지식을 읊어대는데,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 극중 함께 등장하는 이들도 대놓고 불평을 해댈 정도이다. '아아, 미칠 것 같은 이야기군' 이라던가, '도대체 문학이 이 살인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야?' 라던가, '이제 저는 당신의 그 현학주의에 구역질이 납니다'라고 직접적으로 쏘아붙이기도 한다. 독자 입장에서도 노리즈미에게 한 소리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등장 인물이 대신 해주니 속이 시원할 법도 하지만 사실 그런 걸 느낄 겨를도 없이 탐정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질리는 게 더 먼저라는 사실이 아이러니긴 하다. 일단 상황이 이러하니, 추리소설 자체의 재미를 느끼기 보다 역대 가장 현학적인 탐정 캐릭터를 만난다는 데 의의를 두고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일시에 정지한 것 같았다. 마침내 가면이 벗겨지고 이 광기 어린 연극은 끝났다. 항상 심미성을 잊지 않는 노리미즈의 수사법이 여기에서도 또 초기 화약 기술과 연관된 종교전쟁으로 장식되어 화려하기 짝이 없는 결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검사는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담배를 입에서 뗀 채 멍하니 노리미즈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노리미즈는 빈정거리는 듯 웃으며 하트의 역사책을 뒤져 그 페이지를 검사에게 내밀었다.    p.314

 

이 작품은 벌써 국내에서 세 번째 출간되는 버전이다. 2005년에 동서 미스터리 북스로 출간되었었고, 2011년에 북로드의 스토리콜렉터로도 나왔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상미디어의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여덟 번째 작품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이 시리즈는 가능한 한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선정하여 번역하고자 했다는 취지로 기획되어 그 동안은 다소 낯선 작가들의 작품이 출간되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오구리 무시타로의 작품을 새롭게 번역하여 다시 선보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개되었던 것이 9년 전이니, 지금의 독자들에 맞춰 현대의 어법과 표현으로 바꾸어 가독성을 높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추리소설 마니아들에게는 '악명 높은 책'으로 알려져 있다. 유메노 규사쿠의 <도구라 마구라>와 나카이 히데오의 <허무에의 공물>과 함께 일본 추리소설 사상 3대 기서 중 하나로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현학적 문장의 나열이 가장 큰 장애물로, 그 난해함으로 인해서 읽고 있는데도 이해가 어렵다거나,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는 등의 평가를 받고 있는데, 나 역시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평범한 독자들에게 '완독하기 어려운'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명탐정의 지루한 장광설로 완독 포기자 속출'한다는 그 명성 때문에 오히려 추리 소설 독자들에게 도전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추리소설 마니아라고 자부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만나 보아야 할, 끝까지 완독하는 걸 도전해봐야 할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이 작품이 1935년에 일본에서 처음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을 때, 서문을 썼던 가가 사부로는 “탐정소설계의 괴물 에도가와 란포가 등장한 지 만 10년째 되는 해에 똑같은 괴물 오구리 무시타로가 출현했다”고 말했다. 함께 서문을 썼던 에도가와 란포는 서문에서 “이 작품은 이미 쓰인, 또 이제부터 쓰일 모든 탐정소설의 소재가 집대성된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했고 말이다. 자, 이제 도전 욕구가 샘 솟는다거나, 정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거나, 대체 어떤 작품인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은 아마도 추리소설 마니아일 것이다. 그러니 당신에게 이 특별한 추리소설을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