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의 눈물
권지예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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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다가 아냐. 난 아침에 눈 뜨면 정말 행복해서 노래해. 내 자식들, 내 손자들, 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해. 우리도 사는 데 물론 스트레스 많이 받아. 어느 곳에서든 인생이 늘 행복한 건 아닐 거야. 모니카, 부자인 너도 그렇지 않니? 베로니카, 나 부자 아니야. 물론 아주 가난하지도 않지만. 오, 그래? 모니카! 봐봐, 돈은 중요하지만 인생은 돈이 다가 아니잖아. 그럼 어찌 사는가가 중요해. 사랑이 제일 중요하지. 내 마음에는 사랑이 가득하거든. 가난하지만 행복하다구.        

-'베로니카의 눈물' 중에서, p.60

 

작가인 모니카는 쿠바의 아바나에서 몇 달간 지낼 임대 아파트를 구한다. 그리고 입주한 첫날 뚱뚱하고 나이가 꽤 많은 백인 여성인 베로니카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주인인줄 알았지만, 실제 주인은 마이애미에 있고 그녀는 관리인이었다. 월세에 청소비와 관리비가 포함되어 있기에 베로니카가 주기적으로 집에 들러 모니카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 언뜻 보면 그럴듯해 보이는 집은 싸구려 비닐 소파에 낡은 가구들, 가스레인지는 표면에 녹이 슬어 있고, 솥단지 같은 냄비는 바닥이 검댕으로 두툼하게 더께가 져 있는 등 한국 같으면 몽땅 쓰레기장에 버리고도 남을 물건들 투성이였다. 게다가 물에 석회가 많아 끓여서 가라앉힌 뒤 먹어야 했고, 가스레인지 불을 켜거나 온수 보일러를 켜는 것도 성냥불을 켜서 화구에 대며 점화를 시켜야 했기에 만만치가 않았다. 낙후된 환경에서, 부족한 것 투성이에, 불편한 상황들에 적응하느라 정작 모니카는 제대로 된 글을 써보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낸다.

 

베로니카는 약속한 날짜가 아니라 수시로, 아무 때나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집에 오곤 했다. 그러다가는 일주일째 연락도 없이 안 오기도 하는 등 제멋대로였지만, 막상 만나면 이상하게 웃음과 따뜻함을 안겨주었다. 올해 일흔 셋이 된 베로니카는 이제 자신도 늙어서 일이 힘들다며, 모니카가 한국으로 떠나면 자기도 일을 그만둘 거라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실험실 간호사로 오래 일을 했던 전문직 여성이었지만, 은퇴하고 지금처럼 방을 청소해주고 받는 월급은 형편없었다. 우리 돈으로 한 달에 1만 2000원 정도였던 것이다. 자신이 이곳에 머물면서 한 달에 100만 원이 넘는 월세를 내는데, 관리인 월급이 겨우 1만 2000원이라니, 모니카는 속이 상하고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쿠바의 엄마와 딸' 관계로 발전하게 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하나 생기면서 이들의 관계도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당신도 다 아는 아바나의 관광지를 내가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내게는 도시 자체가 꼭 무대 세팅 같았어요. 빛과 그늘이 극명하게 구분되는 무대. 황 교수의 빠른 걸음을 놓칠세라 앞만 보고 잰걸음으로 다닌 곳, 그런 관광지나 유적지가 조명이 비친 곳이라면, 그 옆의 골목과 집들은 그늘에 가려져 있는 듯한 무대. 그 그늘에서 맨발의 아이들이 뛰놀고 폐허가 된 건물 귀퉁이에 사람이 사는지 빨래가 걸려 있었어요. 빛의 세계로만 나를 안내하려는 황 교수의 배려를 나는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나를 방치했어요.     

-'파라다이스 빔을 만나는 시간' 중에서, p.161~162

 

나는 쿠바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책의 표제작인 <베로니카의 눈물>을 읽으면서, 내가 언젠가 한 번 아바나에 가본 게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들었을 정도로 극 중에서 주인공이 겪었던 시간들이 체감되는 느낌이었다.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순수와 오염, 자유와 고독, 혼돈과 모순, 환상과 환멸, 매혹과 잔혹'으로 상징되는 쿠바의 다양한 매력을 관광객으로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이 되어 살아보는 듯한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이 작품에 수록되어 있는 여섯 편의 소설은 쿠바 아바나, 프랑스 파리, 미국 플로리다 등 다양한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해외 여행 중이거나 그곳에 단기 체류 중인 걸로 등장한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낯선 이국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너무도 매혹적이다. '이국'과 '낯선 장소'라는 설정만으로도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변화들이 색다르게 다가오니 말이다.

 

<낭만적 삶은 박물관에나>에서 사진작업 차 파리를 다시 찾은 재이는 오래 전 그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던 전남편을 다시 만나기로 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는 친구 부부의 세미나에 대리 출석하기 위해 딸과 함께 플로리다에 온 현주가 딸이 성폭행 피해자였고 미투 고백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카이로스의 머리카락>에서 은혼식을 맞아 남편과 함께 발칸반도의 아홉 나라를 도는 패키지여행을 떠난 복순은 애써 덮어두고 있었던 그간의 묵은 감정과 기억들과 마주하게 된다. 여행이란 사람을 좀 더 가깝고 애틋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반면 평소보다 가까워진 그 물리적 거리로 인해 서로가 알지 못했던 낯선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여행을 통해 일상의 숨겨진 이면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되고, 내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권지예의 소설집은 매혹적이다. 누구라도 이 작품들을 읽게 되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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