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어느 날
조지 실버 지음, 이재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내가 할 수 있었던 것들이, 해야 했던 것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하지만 당장 중요한 순간에는 그중 어느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으니까.
관객이 있었다면 아카데미상도 아깝지 않을 60초짜리 무성 영화였다. 만약 누군가 내게 첫눈에 사랑에 빠진 적이 있는지 물어보면, 이제부터 나는 그렇다고 해야 한다. 2008년 12월 21일의 어느 눈부신 1분 동안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p.15~16

 

12월 21일 밤, 로리는 죽도록 피곤한 상태로 초만원 2층 버스의 위층에 앉아 있었다. 드디어 크리스마스 휴가가 시작될 참이었고, 일에서 놓여나 너무 기뻤다. 내일부터 계획은 복작대는 런던을 잠시 떠나 고향 집에 내려가 내년이 올 때까지 푹 쉴 예정이었다. 아직도 집까지는 한참 가야 하는데, 버스는 승객들로 미어 터지고 있어 짜증을 참아 보려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밀고 밀리는 북새통 따위 안중에 없는 무심한 태도로 들고 있는 하드커버 책에 열중해 있었다. 그러다 로리와 남자의 시선이 똑바로 만난다. 몇 초간 두 사람은 눈을 돌릴 수가 없었고, 그녀는 갑자기 그리고 난데없이 버스에서 내려야 할 것만 같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만원 버스 속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가망은 전혀 없었고, 대신 남자에게 당장 버스에 올라타라는 눈빛을 보낸다. 서로 마주보는 상태에서 어느 순간 남자가 미소를 짓기 시작하고 버스에 타기 위해 움직이지만, 이미 버스 문은 닫히고 출발해버린다.

 

로리는 그 남자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버스보이'를 찾기 위해 가장 친한 친구이자 룸메이트인 세라와 함께 이곳 저곳을 헤매고 다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덧 다시 12월이 되었고, 세라는 새로 만나기 시작한 남자 친구를 크리스마스 파티에 데려온다. 현관문 옆에 어색하게 서 있는 세라의 남자 친구, 그가 바로 열두 달 전 만원 버스 2층에서 심장이 멎는 듯했던 눈 맞춤을 했던 그 '버스보이'였다. 그와 우연히 마주치기만을 빌면서 지난 1년을 보냈는데, 드디어 만나게 되었지만 하필 세라의 애인으로 등장하다니.. 로리는 지옥에 있는 듯한 기분이다. 게다가 세라는 그녀에게 피붙이만 아닐 뿐 모든 면에서 친자매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아무리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이 무슨 유치 찬란한 성탄 특집 영화 같은 설정이란 말인가. 로리는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막막하기만 하다.

 

 

밖에 동화처럼 눈보라가 치고 있지만 여기는 나니아 왕국이 아니다. 여기는 런던이라는 현실 세계다. 심장이 채이고, 멍들고, 부서지는 곳. 그런데도 여전히 심장이 뛰는 곳. 나는 꿀렁꿀렁 조심조심 움직이는 택시의 차창으로 점점 멀어지는 그를 바라본다. 그도 나를 바라본다. 손을 코트 주머니에 깊이 찔러 넣고 바람 때문에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로. 택시가 모퉁이를 돌자 나는 차가운 유리에 머리를 기댄다. 내 심장과 양심이 동시에 납처럼 무겁게 내려앉는다.    p.136~137

 

가끔 눈 깜빡 할 새 한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이 파악될 때가 있다. 모래알만 보고 우주를 이해할 수 있듯이. 제스처 하나 때문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고, 말이나 행동, 그날의 분위기 때문에 한 순간에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감정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12월이고, 그런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계절이다. 겨울은 옆구리가 허전한 계절이고, 크리스마스에는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는 생각에 솔로인 사람들은 분주히 주변을 살펴서 자신의 짝을 만나길 기대한다. 좀 더 능청스럽게, 좀 더 용기를 내서, 앞뒤 재지 말고 그냥 말할걸 왜 못 했나, 가슴 치며 후회할 순간들이 무수히 많이 생기곤 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이고 말이다. 물론 우연히 마주쳤지만, 어쩌다 놓쳐버린 인연이 실제로 다시 만나게 될 확률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소설 아닐까 싶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는 세상의 수많은 로맨틱한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설레이는 감정을 안겨주는 작품이니 말이다.

 

이 작품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작가 조지 실버는 독특하게도 스물두 살 생일에 자신이 발을 밟은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다고 한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시작된 사랑이라는 실제 경험 때문인지, 이 작품 역시 수많은 영화에 비견되며 추운 겨울, 특히 크리스마스를 맞아 꼭 읽어야 할 로맨스소설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러브 액츄얼리'나 '브리짓 존스의 일기' 같은 작품을 좋아한다면, 이 작품 역시 사랑스럽고, 따뜻하게 느껴질 것 같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 따위, 이제는 믿지 않는 너무도 현실적인 어른이 되어 버렸지만, 가끔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은 순간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로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어쩐지 운명을 믿고 싶어 질테니 말이다.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벼락처럼 내리치는, 운명적 사랑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단지 그 순간이 아직 오지 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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