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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땐, 책 - 떠나기 전, 언제나처럼 그곳의 책을 읽는다
김남희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11월
평점 :
시공간을 축으로 진행되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시간은 죽음이라는 일방통행로를 따라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시간이 우리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데 비해 공간은 유동적이며 탄력적이다. 선택의 가능성이 있기에.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 찰나의 스치는 만남, 이런 것들이
어떤 공간에서는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결과로 변할 수도 있다. 삶에서 예외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상상을 열어주는 공간'이다. 어떤
장소는 우리의 상상을 현실화시키고, 더 나아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 삶을 열어주기도 한다. p.68~69
여행지를 정하고, 숙소와 티켓을 예약하고 현지에서의 계획을 세운 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여행 가방을 싸는 일이다. 꼭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가져가는 것이 목적이라 옷이든 화장품이든 짐을 가볍게 하는데 우선 순위를 두고 짐을 챙긴다. 하지만 책을 서너 권 넣고 나면 항상
망설이게 된다. 이 책을 더 넣을까, 아님 이 책을 빼고 이 책을 데려갈까. 그러다 어느 날에는 겨우 2박 3일 일정의 여행인데, 책을 열 권을
챙겨간 적도 있다. 그렇게 책으로 가득 차 돌덩이가 든 것처럼 무거운 가방을 가져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데리고 오는 여정이 만만치 않았던 기억이
난다. 비행기에서 읽을 책, 호텔에서 자기 전에 읽을 책, 현지의 어느 곳을 방문했을 때 그곳과 어울리는 책들도 데려가고 싶은 마음에 짐을
챙기다 보면, 이건 사람이 여행을 가는 건지 책이 여행을 가는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시간이 여행만큼이나 설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에 '걷기 여행' 붐을 일으킨 도보여행가이자 한국 대표 여행작가인 김남희 역시 여행 가방의 필수품이자, 삶의 필수품을 '책'으로
꼽는다. 그녀는 말한다. 근사한 집이 없어도, 든든한 통장이 없어도, 다정한 연인이 없어도, 독서와 여행이 가능한 삶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행은 몸으로 읽는 책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기에, 여행과 독서는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그녀의 여행 역시 배낭에 넣어갈 책을 고르는
일로 시작된다고 한다. 이 책은 작가가 여행을 떠나기 위해, 혹은 여행지에서 습관처럼 펼쳐 든 책들의 이야기가 작가가 머문 그곳의 이야기가
어우러진 순간들을 담고 있다.
불빛이 비치는 서점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 드넓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기분이다. 슬며시 서점 안을 둘러보며 주인의 취향을 가늠해볼
때면 나쁜 짓이라도 하는 듯 심장이 두근거린다. 시류에 호응하는 책들 사이에 놓인 비주류의 책이 고집스러운 주인의 취향을 은근히 드러낼 때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소중히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면 취향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다. 책장에서 한 권의 책을 빼내 손에 들
때면 묻어 있는 먼지조차 사랑스럽다. p.137
느릿느릿 흘러가는 치앙마이에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천천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고요한 언덕의 도시 리스본에서는
리스본을 사랑한 작가의 소설을 골라본다. 불과 얼음의 땅,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자연이 살아 있는 레이캬비크에서는 범죄 소설이 어울릴 것 같아
평소라면 잘 읽지 않을 장르의 책에도 과감히 손을 뻗어본다. 마음의 그물이 느슨해지는 여행지에서는 독서의 취향조차 넉넉해지곤 하니 말이다.
그리스의 작은 섬 이드라는 어디서건 고양이들을 만날 수 있는 '고양이 섬'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매일 고양이와 함께하는 날들을 보내며 그녀는
후지와라 신야의 책 <인생의 낮잠>을 떠올린다. 네팔 포카라의 호숫가 카페에서 처음 읽었던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끝으로 누르며 한동안 호숫가를 서성이게 만들었고, 브라질의 마나우스까지 들어가 신청한 아마존 투어를
했지만 아마존을 제대로 알지 못해 놓쳐 버린 많은 것들의 아쉬움을 달래 주었던 건 생물학자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의 <나무의
노래>였다.
그 외에도 이 책에는 수많은 여행지와 함께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등장한다. <그리스인 조르바>, <바닷마을
다이어리>, <섬에 있는 서점>, <인투 더 와일드>, <안나 카레니나>, <작은 것들의 신>,
<모스크바의 신사>, <스노우 블라인드> 등등... 많은 책들이 여행과 함께 하고 있다. 서른네 살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세보증금과 적금을 빼서 세계 일주를 떠났던 모험 이후, 여행자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 이제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여행이 매혹적인 이유는 여행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과 후, 우리는 결코
같은 사람이 아니다. 여행을 통해 낯선 곳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어떤 경험을 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변화하게 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 상 멀리 떠날 수 없을 때는 책 속으로 떠나면 된다. 독서라는 행위가 주는 가장 큰 매력이 준비 없이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점이니 말이다. 숨 막히게 답답한 이 세계를 잠시나마 벗어나 책 안의 새로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떤 삶이든 선택할 수
있다. 여행과 책이라는 환상의 콜라보에 당신을 초대한다. 언젠가는 우리가 여행지에서 책을 든 채 마주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