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자카야에서 찌그러져 있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다. 이자카야에 혼자 들어가 다들 즐겁게 왁자지껄 마시는 모습을 어두운 눈초리로
흘깃흘깃 바라본다. ‘괜찮아. 나야 뭐 어차피…’라고 생각하며 기가 살짝 죽은 채 술을 마신다. 그런데 이게 즐겁다. 어두운 눈매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몹시 귀엽다. 이런 이상한 취미의 소유자다. 그런데 취미라는 것은 점점 깊은 곳으로 빠지게 마련이므로 ‘이자카야에서 혼자
마신다’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 ‘이자카야에서 대낮부터 마신다’고 하는, 한층 더 과격한 조건에 끌리게 된 것이다.
p.24~25
요즘은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1인 가구 증가로 인해 혼밥족이 늘어난 것도 있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영화를
보는 등 혼자서 즐기는 1인 문화 ‘혼족’이 익숙한 분위기 탓도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독신자나 혼밥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일상이 된
풍경일 것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50년 장기 연재 중인 관록의 만화가이자 반세기 넘게 혼밥을 실천해 온 달인 쇼지 사다오의 국내 첫
소개작이다. 무려 1987년 1월부터 <주간 아사히>에 연재 중인 <저것도 먹고 싶다. 이것도 먹고 싶다>에서 발췌한
내용을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박찬일 셰프의 추천평을 보니, 낮술과 아침술을 즐기는 대책 없는 만화가 할배의 책을 힘겹게 번역해서 읽어왔다고
하는데 그만큼 쇼지 사다오의 타고난 입담과 유쾌한 그림은 매혹적이다.
쇼지 사다오는 국내 독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50년째 연재 중인 주간지만 두 개인 관록의 작가이다. 그를 담당했던 젊은
편집자들이 줄줄이 정년 퇴직하는 사이, 80대의 노장 만화가는 변함없이 그리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흔들림 없고 성실한 일상
뒤에는 매일의 작은 즐거움을 안겨주는 '혼밥'과 '혼술'이 있었다.
말캉말캉한 무가 이에 닿는 식감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 식감을 살짝 가로막고 유부의 쫄깃한 식감이 더해진다. 거기에 유부의 기름 맛이
사르르 퍼진다. 그 기름의 맛 또한 무에 적당하게 잘 배어 있다. 무채 유부 된장국을 먹고 있노라면 한 순간 황홀해지며 머릿속이 텅 비어버릴
때가 있다. 유부는 '된장국 세계의 중매쟁이'답게 무와 된장을 훌륭하게 묶어주고 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유부의 맛이 다른 것을 압도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유부는 물러설 줄 안다. 게다가 그 방식도 훌륭하다. 한 순간 존재감을 드러낸 뒤 '어?' 하는 순간 어딘가로 벌써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p.216
이 책에 따르면 고전적인 백반집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정도가 무려 열한 가지나 되는데, 특히나 가게 주인의 항목에 빵 터지고 말았다.
가게 주인은 무뚝둑해야 하고 다소 언짢아 보이고, 약간 삐딱한 느낌이라야 한다나. 게다가 손님이 들어왔을 때 "어서 오세요"같은 인사는 금지고,
손님이 주문을 마쳤을 때도 "알겠습니다"같은 리액션은 금지이고, 복장은 티셔츠에 앞치마 차림인데 앞치마에 얼룩은 필수라고. 하핫. 물론 쇼지
사다오의 매우 개인적인 기준이지만, 어쩐지 우리가 쉽게 상상하는 맛집의 이미지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아 재미있었다. 그가 자신만의 철학으로
나에게 흡족한 한 끼를 완성해 가는 과정은 굉장히 주관적인 이야기지만, 먹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아마 대부분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그가 소개하고 있는 요리와 가게 들에 대한 묘사도 흥미진진하다. 아침 9시부터 영업하는 이자카야에 가서 마음 먹고 '찌그러져서 한잔'을
해보려고 했더니, 곤란하게도 가게 안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밝고 즐거워서 오히려 긍정적인 기분이 들어서 힘이 솟았다는 에피소드도 재미있고, 방송을
보다 유명한 맛집 탐방 리포터가 햅쌀밥을 한 입 먹고는 이런 밥이라면 반찬 같은 것도 필요 없겠다는 소리에 반찬 없이 밥 한 공기에 도전해보는
엉뚱함은 귀엽기도 했다. 굳이 임페리얼 호텔까지 가서 2,625엔이나 하는 햄버거를 먹기도 하고, 굴튀김을 정말 좋아한다며 막 조리가 끝난
굴튀김을 먹는 과정을 놀라울 정도로 세세하게 묘사하며 굴의 물컹함에 대한 고찰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 외에도 돈카스 카레를 먹는 올바른
방법이라든가, 살코기보다 비계가 좋은 이유, 감동의 무채 된장국과 무조건 맛이 보장되는 계란프라이 덮밥에 대한 글도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식사를 하며 느끼게 되는 기쁨과 다양한 음식에 대한 세세한 묘사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쇼지 사다오와 함께 식사를 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잘 읽었다'가 아니라 '잘 먹었다'고 말을 해야 할 듯한 느낌이다. 물론 밥을 먹는 것도 혼자가 최고라고
외치는 쇼지 사다오이지만, 이 책과 함께라면 그의 밥상으로 초대받는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