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에서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가 똥 몇 번 쌌다고 동물 관리국 사람한테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매콤 씨. 이봐요, 난 단지 서로 좋은 이웃으로 지냈으면 해요. 당신한테 무시당하니까 기분이 나빴을 뿐이에요. 진심으로 대하지 않으니까요. 이웃끼리 그러는 거 아니잖아요. 최소한 동네에서는 그러는 거 아니죠."

", 좋은 이웃이라는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우리도 잘 알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여기 이 동네에서 말이에요."     p.43

195센티미터 장신의 스콧 캐리는 벨트 위로 불룩 나온 배와 운동기구로 다져진 허벅지 근육을 가진 평범한 중년 남자이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자신의 몸무게가 비정상적으로 매일 줄어들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몸무게가 13킬로그램이나 줄게 되자 그는 은퇴한 의사이자 친구인 닥터 밥에게 찾아간다. 이미 주치의한테 가서 정기검진도 받아봤지만 모두 정상 범위 안에 든다는 결과를 받은 상태였다. 닥터 밥이 보는 앞에서 체중계에 올라선 그의 몸무게는 96킬로그램이었고, 주머니 속의 동전 한 움큼과 부츠, 바지, 파카 등을 모두 벗고 다시 체중을 재도 역시 96이었다. 게다가 그의 상태는 겉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고, 109킬로그램으로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옷을 벗었는데도 옷 입을 때랑 똑같은 체중이 나가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테니 말이다. 스콧의 몸무게는 매일 0.5킬로그램가량씩 규칙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체중이 줄어들면 그는 어떻게 되는 걸까.

칼로리가 높은 음식들로 과식을 해도 체중은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고, 더 이상한 건 9킬로그램짜리 아령을 손에 하나씩 들어도 옷을 벗고 체중계에 올랐을 때랑 몸무게가 같다는 거다. 허리 사이즈나 다리 길이나 물리적 차원에서는 변화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꼭 스콧 주변에 중량을 반하는 힘의 장이라도 생긴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였다. 옷을 입거나 물건을 들거나 하면 중량이 더해져야 하는데, 왜 스콧에게는 그렇지 않은 걸까. 게다가 몸무게가 일정하게 계속 감소한다면 언젠가는 몸무게가 바닥 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스콧은 그 불가해한 상황에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일상을 느긋하게 보내기로 한다.

감소하는 속도가 더 빨라지지 않는다면 지금 예상하기로 몸무게가 바닥 나는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속도가 빨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콧은 그 와중에도 인생을 만끽하기로 했다. 그게 자기 자신에 대한 도리라고 느꼈다. 어쨌든, 가망이 없는 상태에 처한 사람들 중 전적으로 기분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그리 흔할까? 스콧은 이따금 노라가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서 배워 온 어느 격언을 생각했다.

과거는 역사이고 미래는 불가사의다. 그의 현재 상황과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p.97

이 작품은 무려 '스티븐 킹'의 신작이다. 아마도 작가명을 가린 채 블라인드북으로 이 작품을 읽었다면 대부분의 독자들이 스티븐 킹의 작품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전에 없던 상냥함이 느껴진다'는 뉴욕타임스의 추천평처럼, 우리가 그 동안 스티브 킹의 호러 미스터리나 스릴러에서 느껴왔던 그 오싹함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첫 장에 '리처드 매드슨을 추모하며'라고 작가가 밝히고 있기도 하듯이, 이 작품은 <나는 전설이다>로 잘 알려진 SF 작가 리처드 매드슨의 또 다른 대표작 <줄어드는 남자>를 오마주한 소설이다. 리처드 매드슨의 작품에서 방사능이 섞인 안개에 닿은 후 점차 몸이 줄어들게 된 평범한 소시민 스콧의 이야기는 사실 좀 오싹했다. 키를 비롯해서 온몸이 일괄적으로 줄어들어 결국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져 벌레로부터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그의 생존 이야기는 고통과 외로움을 동반했으니 말이다. 그에 비해 스티븐 킹의 작품에 등장하는 (또 다른) 스콧의 이야기는 조금 더 경쾌하고, 따뜻하다.

점차 몸무게가 줄어드는 스콧의 이야기는 그의 옆집에 사는 레즈비언 커플에 대한 이웃들의 차별과 편견, 동성혼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스콧은 이들 부부와 애완견 문제로 사소한 분쟁을 벌이게 되는데, 그들이 사람들의 공격적인 시선과 차별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한다. 그가 사람들의 증오에 맞서 싸우는 방법은 바로 자신의 줄어든 몸무게를 활용한 것이었는데, 지역 마라톤 대회 에피소드는 뭉클하고 감동적이었다. 내가 스티븐 킹의 작품을 읽으면서 이런 단어를 사용하게 될 거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특히나 마지막 장면은 마치 아름다운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인상적이었다. 기존 스티븐 킹의 작품들에 비해 가벼운 분량이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그 여운의 잔상은 꽤 오랫동안 남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