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쉬즈 곤
카밀라 그레베 지음, 김지선 옮김 / 크로스로드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은 어쩜 그런 짓을 할 수 있죠? 네르미나한테 일어난 일만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전쟁 말이에요. 어떻게 이웃이 이웃한테 등을 돌리고, 강도질을 하고 살인을 하는지. 애어른 할 것 없이 8천 명의 남자들이 스레브레니차에서 대량 학살을 당했어요. 가족과 격리되어 구류당해 있다 가축처럼 도살당한 거죠. 그리고 세계는 손 놓고 구경만 했고요. 8천 명! 인류는 도대체 뭐가 문제죠? 그리고 그건 절대 끝나지 않아요. 악함은 악함을 먹고 살아요. 보스니아에 이런 속담이 있어요. 코 세예 베타르, 자네 올루유. 이런 뜻이죠. 바람 씨를 뿌린 자, 태풍을 거두리라.”   p.238

스웨덴의 작은 마을 오름베리의 눈 덮인 숲에서 한 여성이 구조된다. 옷이 흠뻑 젖고 찢어진 상태에다, 재킷도 없이 맨발에, 팔은 피와 흙으로 얼룩져 있는 상태였다. 바깥은 꽁꽁 얼어붙도록 추운 날씨였고, 어제의 폭풍에 이어 가벼운 진눈깨비가 날리는 날씨였다. 발견된 여성은 바로 프로파일러 한네 라겔린드로, 그녀는 연인이자 동료 수사관인 페테르와 함께 한 소녀의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사라진 페테르의 행방도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녀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 가는 중이었고, 그래서 자신의 갈색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모든 것을 꼼꼼하게 기록해왔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되어 나타나면서 노트를 잃어 버리고 말았고, 한네의 노트는 그녀를 발견한 소년 제이크가 가져가게 된다.

이야기는 세 가지 인물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수사관인 말린과 마을 소년 제이크, 그리고 제이크가 발견해 읽게 되는 한네의 일기장 속 과거 시점이다. 그래서 현재 말린이 속해 있는 수사 팀의 사건 전개와 일기장 속 한네와 페테르가 수사하던 사건에 대한 전개가 함께 진행되면서 숨겨진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게 된다. 특히나 사건 수사 자체보다 각각의 인물의 내면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각 캐릭터들의 목소리가 매우 뚜렷하게 시선을 잡아 끌고 있어 더욱 시선을 뗄 수 없는 작품이었다. 대부분의 북유럽 소설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 역시 장소와 날씨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스웨덴의 외딴 마을 오름베리, 한때는 번성한 산업도시였지만 이제는 버려진 공장들, 문을 닫은 상점들, 부스러져 가는 집들이 거의 전부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숲과 길고 긴 겨울과 가난 속에서 얼마 남지 않은 거주민들은 희망을 잃고 무력하게 살아간다. 이곳은 밤이면 마치 무덤처럼 완벽한 칠흑이 되어 버리는 곳이며, 가을 폭풍이 불면 정전이 되고, 폭설이 내리면 길이 막히고, 나무가 쓰러지고, 차는 숲 한복판에서 퍼져버리고 마는 곳,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여러 가지 것들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도망치려 했던 게 바로 이거라고, 난 생각했다.

오름베리, 시골, 빤히 보이는 암울한 미래, 드넓은 벌판과 조용한 숲들. 텔레비전 앞에서 과자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밤과, 저장고를 채우기 위한 가장 가까운 대형 슈퍼마켓으로의 여행. 겨울밤의 혹독한 어둠과 여름의 무자비한 선명함.

모든 것이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끝나 버린 듯한 그 느낌.     p.387

강력계 형사인 페데르와 프로 파일러 한네는 작가의 전작인 <약혼살인>에서 먼저 등장했었다. 전작에서 페테르는 아이가 있지만, 그는 부모로서의 책임도, 남편으로서의 의무도 회피한 채 여전히 혼자 지내고 있었다. 엄마와 살고 있는 아이와는 일년에 한 두 번 만나고, 스스로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한네는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남편에게 질려서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10년 전에 경찰들과 업무를 협조해서 범죄 수사를 함께 했었고, 한때 페데르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의 배신으로 상처를 받은 적이 있는 상태였다. 당시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것은 캐릭터와 구성이었는데, 등장 인물들이 '내면적'으로 복잡한 것으로 묘사되어 수사 자체보다 인물의 내면에 더 집중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 속에서 어느 순간 교집합이 되며 마주하게 되는 극강의 충격과 반전의 힘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신작 <애프터 쉬즈 곤>에서도 이들 두 캐릭터가 등장하긴 하지만, 이야기의 화자는 이들이 아니다. 한나의 일기장을 주워 읽게 되는 소년 제이크와 한나와 함께 수사 팀에 있는 말린의 시선으로 서사가 진행되고 있다. 페테르는 한나의 일기장 속에서 등장하며, 한나는 사라져 가는 기억을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찾아내지 못하고 있어 사건의 주요 서사에서는 약간 벗어나 있다. 대신 제이크와 말린이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한 쪽은 성적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있는 소년이고, 또 한 쪽은 과거의 어두운 기억과 고향인 오름베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어 방황하는 여성으로 일종의 소수자에 해당되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주요 서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언제나 이슈인 난민 문제이다. 과거 희망과 번영의 상징이었던 공장이 난민 수용소가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이 결국 소수자들에 대한 집단적 공격성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그 적의와 공격성이 시종일관 서늘하게 와 닿는 작품이었다. 특히나 북유럽 최고 추리소설에 수여하는 유리열쇠상을 작년에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니, 북유럽 스릴러를 좋아한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