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들이 착용하는 것은 모두
빨갛다. 피의
색, 우리를 정의하는
색이다.
가리개 또한 규정된 보급품이다. 우리의 시야를 제한하는 동시에 우리를 드러내지
않게 해준다.
나는 결코 붉은 옷이 어울리지
않았다. 빨강은 내 색깔이
아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버전이다. 원작 소설의 주제의식을 잘 살려낸 색감과 긴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압축한 각색으로 해외 언론으로부터
'드라마 영상보다 더 뛰어나다'라는 호평을 받았다고 해서 매우 궁금했다. 게다가 텍스트로 읽으면서 상상했던 공간과
배경, 인물들의 이미지를
이미지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설레이기도 했다.
<시녀 이야기>는
1985년 발표 당시 여성을 오직 자궁이라는 생식 기관을 가진 도구로만 본다는 설정 때문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으며, 출간한
지 30년이 되어가는 오늘날에
와서는 성과 가부장적 권력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친,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으로 인해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으로 평가 받고 있다. 최근 Hulu 채널을 통해 드라마로 새롭게 선보이며
또다시 주목 받고 있으며, 드라마는 시즌 3까지 나올 정도로 화제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속작인 <증언들>이
올해 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녀 이야기> 이후 무려 34년
만의 후속작인 <증언들>도
곧 국내에서 만날 수 있다니 매우 기대가 된다.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생각한다. 아침에는 내 집에서
잠을 깨게 될 거라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 있을
거라고.
오늘 아침에도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혹은 근 미래를 배경으로 길리어드
공화국, 여러 가지 원인들이
겹치고 겹쳐 인류에게 끔찍한 재앙이 벌어진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국가에서는 임신이 가능한 여성들을 강제로 징집해
관리하고 통제하기 시작한다. 여성들은 신체적 기능에 의해 하녀,
아주머니,
시녀,
아내 등등의 역할로 규정되고 그들에게 더 이상의 개인적인 삶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 작품의
주인공이기도 한 '시녀'는 출산이
가능한 생식능력을 가진 여성으로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은 국가를 지배하는 고위층 부부들에게 할당되어, 그 집의 주인 남자들과 주기적으로 관계를 갖고
임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부여 받는다.
"나는 씻기고 솔질하고 배불리 먹인 한 마리의 경품용 돼지처럼
기다린다"
시녀는 주인 남자의 정부나 애인이 아니라, 그저 의무적으로 그들
부부에게 '자궁'만을
임대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쾌락, 욕망, 연애 감정
따위는 사라져 버렸고, 오로지
종족 번식을 위한 끔찍한 의례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관계를 맺는 장소에서 그
행위를 돕고 지켜봐야 하는 고위층 아내들의 상황 역시 결코 행복할 수 없겠지만, 붉은 색의 드레스와 구두, 하얀색 가리개로 얼굴까지 가리고 어딜 가든지 감시를 받으며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여자의 처지는 가슴이 서늘해지도록 섬뜩하다.
르네 놀트는' 피의 색인 빨강과 그 전조를 암시하는
주황, 진홍, 적갈색의
색채 활용'을 통해 극중
인물들의 감정을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통제된 사회 이전의 과거 회상 장면의 채도와 반복되는 악몽의 느낌을 다르게
보여주고, 강렬한 소설의
서사를 압축해서 임팩트있게 전달하면서도 이야기의 여운을 남겨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사실 원작 소설은 오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다 이야기가
담고 있는 무게 때문에 읽기에 만만치가 않다.
그러니 만약 원작 소설을 아직 읽기 전이라면 그래픽 노블 버전으로 먼저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곧
출간될 <증언들>을
만나기 전에 미리 읽어보면 더욱 좋을 테고 말이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는 소설이 지닌
깊이 있고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만화가 지닌 시각적 효과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점에 있어 굉장히 훌륭한 장치이다. 어른들의 만화라고도 불리며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띠고 있다고 보면 되는데, 보통은 매우 길고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고,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이미지로 전개가 빠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촘촘히 글자가 박힌 소설책보다는 눈의
피로도 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좋은 반면에,
조금 내용이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렇게 원작 소설이 이미 존재하고, 그 뒤에 그래픽 노블이 나온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래픽 노블이 가진
장점과 소설의 단점이 적절하게 손을 잡은 느낌이랄까.
그래픽 노블의 장르적 특성이 빡빡한 지면 구성, 때론 실험적인 내용들인데, 원작이 있는 경우에는 그런 점이 오히려 문학성
높은 만화 혹은 예술적 성향이 강한 만화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그래픽 노블이 가격대가 좀 비싼 편인데, <시녀 이야기>는 가격도 아주 착하다. 자, 모두들 이 특별한 기회를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