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시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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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너무 일찍 죽었어. 열세 살이었지."

"안됐군. 당신 같은 사람이라도."

"그렇지." 두 사람은 이제 갑판에 올라왔다. 도로는 바다를 보며 말했다. "나는 삼천칠백 년을 넘게 살았고 수천 명의 자식을 가졌어. 여자가 되어 아이를 낳아보기도 했지. 그런데 아직도 내 몸으로 낳은 아이가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다니. 나처럼 다른 존재가 태어났을까?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갔을까?    p.120

도로, 그의 일족 말로는 동쪽,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는 삼천칠백 년을 살아온 인물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그의 육체를 옷처럼 입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불사의 존재다. 그렇게 그는 젊음과 힘을 유지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일족을 만들고 지키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찾아내 자신의 아이를 갖게 하거나 서로 교배시켜 새롭고 강한 일족을 만들며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프리카의 한 부족마을에서 아냥우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태양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녀는 삼백여 년을 살아왔다.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원하는 대로 형상을 바꿀 수 있어 동물로도, 남자로도, 노인과 젊은 여성으로도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냥우는 도로의 일족이 아닌, 야생종(Wild Seed)이었다.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도로는 아냥우에게 제안한다.

“나와 함께 가면 당신 손으로 땅에 묻지 않아도 되는 아이를 보게 될지도 몰라... 내가 당신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자식을 주지."

불사의 존재라는 건 자신이 낳은 자식들이 나이 들어 죽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을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떠나 보내며 살아온 아냥우이기에 그녀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와 함께 떠난 아냥우가 마주하게 되는 현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사람은 삼천칠백 년 넘게 살았어요. 그리스도가, 그러니까 이 식민지의 백인 대부분이 믿는 신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도로는 이미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래 산 후였다고요.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찰나를 스쳐 지나가는 존재였을 거예요.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부족이나 나라, 신과 악마조차도요. 모든 존재가 그를 남겨둔 채 사라지니까요. 하지만 당신, 태양의 여자인 당신은 예외일지도 몰라요. 당신이 다른 사람과는 다른 존재라는 점을 일러 주세요. 느끼게 만드세요.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세요."     p.256

2011 <야생종>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되었다 절판되고 나서, 중고 시장에서 꽤나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던 옥타비아 버틀러의 걸작이다. 초능력자를 흑인 노예에 빗대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역사를 폭로하고 있는 이 작품은 실제로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과 교차되며 비현실적일 만큼 폭력적인 현실을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도로와 아냥우가 처음 만나는 17세기 말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19세기 중반 남북전쟁 전 미국에서 끝 중에 떠 있으면 읽는 동안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감정 이입이 어려워지곤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출발한 이야기라면, 어느 정도의 비약과 과장마저도 마치 진짜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가 넓어진다. 그런 면에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들은 출간된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당대의 현실 속에서 읽힌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근대에 횡행한 노예제도의 폭력성을 고발하려고 도로와 아냥우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초능력자들을 교배시켜 불사의 존재를 만들려는 남자 도로의 모습은 미국 남부에서 흑인 노예를 인위적으로 교배시킨 사건을 상징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단순하게 이분법으로 그려낼 수 없는 것이고, 버틀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양 극단의 캐릭터 도로와 아냥우를 통해 그것을 한츰 더 깊이있게 그려내고 있다. '무언가를 얻을 때는 무언가를 잃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자신의 가치관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캐릭터라고 그녀 스스로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용당하는 가임여성, 인종차별과 노예제, 강자와 약자 사이의 관계,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사라지고 있는 비극까지.. 현실 세계의 갈등과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품이라 묵직한 무게감을 안겨준다. 이 작품은패턴마스터 시리즈에서 네 번째로 출간된 작품이자 프리퀄이라고 한다. 국내에서도 이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을 곧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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