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책
니나 게오르게 지음, 김인순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코마 상태에 있는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부인을 사랑한다고 절대 말하지 않을 사람과 결혼하는 것과 같아요." 닥터 사울이 좀 더 조용히 말한다. "그런데도 부인은 부인의 모든 애정과 에너지를 그에게 쏟아 부어야 합니다. 부인의 모든 사랑을. 부인이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면 말이죠. 행복한 결말 없이. 현재하지 않는 사람과 부인 인생의 많은 부분을 보내게 될 겁니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헨리와 함께 지낼 때는 늘 그랬다.    p.106~107

템스강을 오가는 유람선에서 배의 난간 옆에 서 있던 어린 소녀가 강물로 떨어진다. 해머스미스 다리 위에 있던 사람들은 아이가 떨어지는 걸 보지만 모두 너무 놀라 꿈쩍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수영을 한 게 25년 전임에도 망설임 없이 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한 남자가 있다. 종군 기자로 전쟁터를 누비던 헨리는 그 시절 만났던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헨리는 무사히 아이를 구하고 나오지만, 역광 때문에 그를 보지 못한 운전자가 모는 자동차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하고 만다. 그 사고로 그는 의식불명 상태, 즉 코마에 빠진다. ‘코마라는 단어가 그리스어로깊은 잠을 뜻한다고 하는데, 충격적인 사고로 헨리는 깊은 잠 속에 빠져 들고 만다.

그리고 15일 뒤, 열세 살 샘은 아빠를 만나러 병원에 온다. 벌써 열네 번째 방명록에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고, 그러느라 학교에서 이 수업 저 수업을 한 시간씩 빼먹고 있다. 샘은 멘사 클럽에 가입한 수재이고, 공감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래보다 매우 성숙한 소년이다. 샘은 가족은 엄마와 새아빠 스티브와 동생 맬컴이지만, 언제나 아빠인 헨리를 그리워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 병원에 인위적 혼수상태에 빠진 상태로였지만 말이다. 샘은 아빠를 만나러 오면서 다른 병동에 역시 의식불명 상태로 입원해 있는 또래의 여자아이 메디를 만나게 된다.

 

런던은 두 세계를 가르는 이른 아침의 안개에 뒤덮여 있다. 불안한 걸음걸이로 밤의 어둠을 헤매는 방랑자들의 세계. 나도 한 때 이 세계에 속했다. 한편 일터로 출근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야 하는 사람들의 세계. 두 개의 평행 세계. 두 세계가 마주치는 곳에서, 튜브에서, 버스에서, 이른 아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집에서,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무시한다.

밤의 방랑자들은 자신들 인생의 또 하루가 지나간다는 걸 참지 못하고, 끈을 놓치지 않으려 그 하루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 있는 하루를 허비하지 않으려 한다.    p.246

책을 읽다 보면 누구나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문학의 마법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고 뭔가 달라진다. 허구의 이야기가 우리의 현실에 금이 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페이지의 한 문장, 하나의 단락, 그리고 숨겨진 여백을 통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아주 잠깐이라도 주마등처럼 스치는 우리의 일생을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순간은 책을 덮어도 잊을 수 없다. 앞으로 펼쳐질 기나긴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사실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책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런 작품을 만나게 되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참 설레인다. 바로 이 작품처럼 말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살 수도 있을 다른 삶들이 존재한다는 걸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보통 불의의 사고가 등장하고, 코마 상태에 빠진 인물이 나오는 작품이라면 앞으로 이어질 서사가 어느 정도 예상이 될 것이다. 치료 과정에서 오는 슬픔과 고통, 주변 사람들의 삶과 그 이후에 벌어지게 되는 비극으로 인해 신파성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서사를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인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헨리가 겪는 꿈의 세계와 코마 상태에 빠진 그를 지켜보는 이들의 진짜 현실을 교차 진행시키고 있다. 그가 현실에서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그의 아들과 사랑을 마음속에 품은 채 말하지 않아 오래도록 함께 하지 못했던 전 연인이 병원에서 만나게 되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단순한 슬픔이나 눈물이 아니라 감정을 공유하는 이해의 순간이다.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가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하고, 삶과 죽음이 만나는 경계에서 현실과 환상이 어두운 꿈속을 유영한다. 이 작품은 오래 전 <종이 약국>이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니나 게오르게의 신작이다. 전작에서는 손님의 상처와 슬픔을 진단하고 그에 맞는 책으로 처방하는 독특한 약국이 등장해 책의 힘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뭉클하게 펼쳐졌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사변 소설을 출간하는 출판사를 운영하는 에디를 통해 문학의 힘과 역할을 보여준다. 누구라도 상처의 이면을, 상실의 바깥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운 것을 해내는 것이 바로 문학이고, 이야기의 힘이다. 오랜 만에 눈물 범벅이 되어 읽은 작품이다. 꿈 같은 소설이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가 자신의 최근 작품들에 직접 이름 붙인삶과 죽음 3부작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작품이라고 하니 다른 작품들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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