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손을 보다
구보 미스미 지음, 김현희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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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동안에 푹푹 쌓인 잡동사니와도 같은 기억을 품고 있다가 비눗방울이 터지듯이 그 기억들이 하나둘 사라져버릴 때, 과연 난 누구의 이름을 부를까? 혼다 씨의 작고 둥근 등을 바라보면서, 일본식 주점 현관에서 보앗던 미야자와의 등을 떠올렸다. 미야자와가 지난번 우리 집에 온 날로부터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장마가 끝나고, 벌써 7월의 끝자락이 다가오고 있었다.   p.47

소노다 히나는 노인요양시설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다. 부모님을 사고로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랑 단 둘이 살면서 언젠가 할아버지를 병간호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현재는 혼자 살고 있다. 혼자 남겨진 외로움에 노인요양복지전문학교에서 만난 동창 가이토와 연애를 했지만,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더욱 고독해진다는 것을 깨닫고 헤어졌다. 하지만 헤어진 후에도 가이토는 이런저런 핑계를 들며 그녀를 찾아왔고, 그녀 역시 특별히 그를 밀어내지 못하며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모교의 입학 안내 팸플릿을 제작하기 위해 찾아온 광고회사의 미야자와를 만나게 되면서 가이토와 함께 할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야기는 소노다 히나의 시점에서 시작해 광고회사 사장인 미야자와, 히나의 전 남자친구인 가이토, 그리고 가이토의 직장에 신입으로 들어온 하타나카의 시점으로 계속 교차 진행된다. 하나의 장이 끝날 때마다 앞 장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사실 그때 상대가 올랐던 각자의 상황은 무엇이었는지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보여진다. 사랑에 모든 걸 쏟아 부을 만큼 외로운 여자와 자신을 원하지 않는 여자에게 마냥 집착하는 남자, 사랑 따윈 내 삶에 필요 없다고 여기는 여자와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남자, 사랑에 대해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네 남녀의 이야기는 연애의 여러 모습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어째서 나는 이 바다가 보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내 안에도 저 바다의 파도처럼 나와 타인을 갈기갈기 찢어서 갈라놓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아무와도 마음을 깊이 통하고 통하고 싶지 않다. 타인에게 나 자신을 이해받고 싶지도 않다. 누군가에 대해서 쉽사리 잘 아는 척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 나는 누군가와 마음을 서로 통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나 자신도 그 사실을 훨씬 이전부터 어렴풋이 눈치 챘을 것이다. 나 혼자의 세상에서만 나는 살아갈 수 있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는 것이다.    p.234~235

대담하고 파격적인 장면 묘사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제159회 나오키상 최종 후보작으로 섬세한 문장과 뛰어난 심리묘사로 연애의 달콤함과 씁쓸함을 담고 있다. 아내와 별거 중인 미야자와는 히나와의 만남을 계기로 살아갈 의미를 되찾지만, 그녀의 곁에 계속 머무를 수 없다. 가이토는 히나를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선 힘을 써서 억지로 그녀를 품고, 상처를 주고,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대놓고 추근대며 접근하는 하타나카를 만나 히나를 잊으려고 한다. 남편과 이혼한 하타나카는 한 달에 한번 남편의 요구로 아이를 만나러 가지만, 모성이라는 게 일절 없어 겨우 그 한 시간이 고역이기만 하다. 정작 자신이 낳은 자식한테는 상냥하게 대하지 못하면서, 하루하루 죽음에 다가서는 노인들에게는 상냥하게 대할 수 있는지 스스로도 신기해하는 그녀를 이해하기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늙어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을 보살피는 일을 하는 히나에게 어린 소녀가 묻는다. "사람은 언젠가 죽잖아요. 근데 왜 태어나는 거죠?" 소녀의 순진한 질문에 명쾌하게 대꾸할 수 있는 정답을 가지고 있는 어른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언젠가 죽게 되어 있는데 왜 태어나는 걸까, 어차피 언젠가 헤어지고 말 거라면 대체 왜 모든 걸 다 바쳐서 사랑하는 걸까. 사랑의 끝에 쓸쓸함만 남는 거라면, 영원할 수 없는 그 감정을 우리는 왜 갈구하는 것일까. 감각적인 문체로 섬세하게 사랑의 감정들을 묘사하고 있는 연애 소설이지만, 삶이란 무엇인지,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작가는 한국 독자들을 위한 메시지로 첫 장에산다는 것의 애달픔을 마음껏 음미해주세요라고 썼다. 이 책 속 이야기를 읽는 동안, 그렇게 애달픈 마음으로 삶을, 사랑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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